경계선에 흐르는 건널 수 없는 강
시청 광장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도심의 골목. 저렴한 식료품 가게와 시끌벅적한 펍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사설 기숙사는 방 구하기가 어렵기로 소문난 뷔르츠부르크에서 그나마 공실이 있는 곳이었다. 도심 한복판이라고는 해도 후미진 골목에, 낡은 현대식 건물, 학교와 꽤 떨어진 거리 때문에 인기가 없었던 건지. 이 기숙사를 이용하던 학생은 주로 한국인이나 중국인이었고, 간혹 가다가 한두 명의 독일 학생이 드나드는 정도였다.
1층에는 엄청 큰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2층에 방을 구했다. 남루한 이미지에 비해서 기숙사는 의외로 청결했는데, 시설이야 어떻든 최선을 다해 관리하던 분들의 수고 덕분이었다. 청소 아주머니가 세제를 왕창 넣어 빨래하고서 깨끗이 잘 되었다며 진심으로 기뻐하던 일과, 관리 아저씨가 쓰레기통을 다시 뒤져가며 분리수거를 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독일은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어딜 가나 신선한 세제 냄새가 난다. 근면 성실한 독일 사람들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각적 기억 중의 하나다.
같은 층에는 고등학교 때 유학을 나와 십 년째 외국 생활 중이라는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서 혼자 잠을 청하지 못한다는 그 학생의 옆방에는 줄곧 같이 있어주는 또 한 명의 한국 유학생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 학생들은 밤이 늦도록 처연한 한국 발라드를 온 통로가 울리도록 틀어놓았고, 그 덕분에 기숙사는 독일도 한국도 아닌 그 어딘가의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같은 기숙사의 독일 학생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외국인 학생들의 존재가 기숙사 이미지를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심증은 어느 날 저녁, 그 독일인 친구 무리가 내 방문이 부서지도록 흠씬 두들기더니 깔깔 웃으며 지나간 소동으로 굳어졌다. 그날의 소동과 함께 사라진, 방문 앞에 놓아두었던 내 운동화는 공용 샤워실에서 찬물을 맞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실내에서 신발을 벗고 지내는 한국인의 문화는 독일인에게 낯설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인에겐 문밖에 벗어놓은 신발이 공용 공간을 침해하는 행태로만 보였을 터였다. 어리숙하고 어리석은 이방인은 거슬리기 쉽다. 문화 차이로 생기는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다.
독일의 세제 냄새. 기숙사를 청결하게 유지하던 사람들의 성실함. 그리고 자신들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깐깐함. 종교개혁과 경견주의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독일을 지배하는 이러한 면모를 가장 강렬하게 경험한 것은 외국인이 비교적 적은 도시인 뷔르츠부르크에서였다. 작은 규모의 아담한 도시였지만, 앵글로 색슨족이 게르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시절부터 주교가 다스리던 영토였던 뷔르츠부르크에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의 교회 건축물들이 빼곡했다. 시청 앞 광장에서 강가로 걸어 나오면 와인 생산지의 풍요로운 산지가 펼쳐졌고, 그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마리엔부르크 요새에 오르면 도시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마리엔부르크 요새는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말로 다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 또한 목격해 왔을 것이다.
마리엔부르크 요새는 1525년 일어났던 독일 농민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독일 농민전쟁이 어떤 이유로 발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사회학자와 문화학자 사이의 이견이 갈린다. 분명한 건 당시 농민의 삶이 처참했다는 것이다. 농업에서 상업으로 산업의 중심부가 이동을 하고, 자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부르주아가 생기는 한편, 영지의 근대화와 중앙집권을 통해 농민들은 공유 토지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중과세의 대상이 되었다. 군기술의 발달로 설자리를 잃은 하위 귀족들이 쥐어짤 수 있는 대상도 농민뿐이었으니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온 평등의 바람이 농민의 삶에까지 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바람을 타고 불길이 타오르도록 부채질한 것은 루터의 추종자였던 토마스 뮌처라는 재세례파 종교개혁가다. 그는 모두가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으로, 루터보다도 먼저 독일어로 설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원칙적인 접근을 하는 동안, 뮌처는 성서의 계시가 아닌 내면의 빛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농민들의 아픔에 동조하는 것을 넘어, 원칙을 수정하면서까지 정당성을 옮겨오려고 한 것이다. 급기야는 폭력 투쟁을 통해 봉권영주의 통치권에 대항하여 하층민이 이끄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한다. 그가 이끈 독일 농민전쟁은 약 10만 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난다.
1525년 독일 농민전쟁이 일어났던 당시, 뷔르츠부르크는 틸만 리멘슈나이더라는 조각가가 시장을 맡고 있었다. 틸만 리멘슈나이더는 독일이 자랑하는 천재 르네상스 조각가로, 1483년 스무 살의 나이에 뷔르츠부르크에 정착하여 결혼을 통해 부와 지위를 얻은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며 예술적 평판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얻은 명성으로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의원과 두 번의 시장까지 역임한 틸만 리멘슈나이더는 농민전쟁에서 농민의 편을 들었다. 주교의 연합군이 시민군에 승리한 후 틸만 리멘슈나이더는 목숨은 구했지만, 두 손을 찍혀 영영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시의회에 대항하던 동안 주교는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마리엔부르크 요새에 머물렀다. 현재 그곳에 놓인 것은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작품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던 시기 제작된 그의 작품들엔 그전까지 보지 못했던 인간의 희로애락이 짙게 배어있다. 무엇보다 이 시기가 가져온 변화의 흔적을 강하게 담은 것은 작가의 이름 그 자체다.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와 달리 개인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에 활동한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가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사회 격변기에 활동한 탓에 틸만 리멘슈나이더는 이전까지 예술가가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몫,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에 내몰려 예술활동을 포기하게 되는 파국을 맞았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중세까지의 작품 활동은 대부분 종교화 제작이었고, 서구 유럽의 종교화의 주된 목적은 글을 모르는 평민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는 일이었다는 거다. 다시 말해, 중세의 끝자락에 닿아있던 틸만 리멘슈나이더가 작가의 본분에 충실했다면, 자신의 작품을 통한 복음 전파에 의심이 없었어야 했다. 과연 그는 자신의 선택의 밑바탕이 겨냥한 것이 결국 자신의 일에 대한 부정이었음을 알고 있었을까.
문화와 문화, 시대와 시대가 만나는 경계선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그 강을 건너기 위해선 파괴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인지. 마리엔부르크 요새 아래 흐르는 마인강에 놓인 알테마인교 위로 17세기 세워진 가톨릭 성자들의 위엄한 풍채를 마주한다. 뷔르츠부르크는 반종교개혁에 성공한 예수회의 영향력 아래 수많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예술품들을 남겼다. 틸만 리멘슈나이더는 어쩌면 조각상에 담기는 본질이 목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유산들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화려하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