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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초적 Oct 21. 2023

지리산 아저씨

신년 맞이 산행을 하면서

몇 년 전, 연초에 일련의 다짐과 새해의 염원을 실천해 보고자. 친구와 지리산 1박 2 일행을 준비해서 떠났다.

새벽에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이른 아침 도착해 백무동 코스로 오후에 장터목 대피소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새벽 천왕봉을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첫 지리산행, 대피소에서 저녁으로 삼겹살을 먹겠다는 로망으로 가득 차 캠핑용 조리도구와, 고기, 채소 등을 꽁꽁 싸서 꽤나 무게가 나가는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갔다. 친구와 등반하기 전 조급하게 오르지 말자고 약속을 하고 등반했다. 하지만 덩치에 비해 체력이 안 좋은 나는 친구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앞에 보이면 쫓아가게 되는 기분이 들어서 아예 더 천천히 오르며 친구를 먼저 보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옆에는 50대 초반의 아저씨가 함께 오르고 있었다.

속도와 쉬는 구간이 비슷해서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렇게 두어 번 마주쳤을까.

"젊은 친구가 이런 데를 다 올 생각을 하고 아주 멋있네요."라며 말을 걸어오셨다.

"친구랑 신년맞이로 같이 왔는데, 친구는 먼저 올라가고 저는 천천히 가고 있어요."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웃으면서 자기도 친구랑 함께 왔는데 성격이 급한 친구라 먼저 올려 보내고 혼자 가고 있는 중인데 같은 처지라며 잠시의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다시 묵묵히 오르다 보니 오후 세시즘이 돼서야

장터목 대피소에 함께 도착했다.


도착해 친구와 만나 한숨을 돌린 후 대피소에 마련되어 있는 취사장으로 가서 이른 저녁 준비를 했다.

준비해 온 버너와 코펠에 삼겹살을 구우니 고기가 그렇게 타더라.. 연기가 자욱해서 타기만 하는 고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한 노년의 한 부부가 본인 코펠은 코팅이 되어 있으니 이것을 사용하라고

빌려 주셨다. 이것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인심인 것일까. 벅찬 감동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산 인심 덕분에 노릇하게 잘 구워 저녁의 낭만을 채웠다. 함께 올라온 아저씨도 친구와 함께 취사장으로 오셨다. 간단한 끼니들만 가져오셨길래 구워진 고기를 몇 점 나누며 함께 먹었다.


그렇게 대피소의 밤은 찾아왔고, 군시절 생각나는 쾌쾌한 모포를 이불 삼아 잠을 청했다. 화장실을 가려 밖으로 나갔는데, 하늘과 가까워진 무수한 별을 바라보고 있으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자연 앞에선 어딘가 모르게 숙연하게 된다. 그렇게 짧은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 하나둘씩 일어나 간단한 요기를 한 후 캄캄한 산 길을 랜턴 빛만 의지하며 천왕봉을 향해 등반한다.


하루 밤 사이 정이 생겼는지, 우리는 어제 함께 한 아저씨들과 어제 같은 짝을 이뤄 선발대, 후발대처럼

둘씩 나누어 등반했다. 물론 나와 아저씨는 후발대였다.

오르다 보니 어느새 동은 트여오고, 지리산의 절경이 펼쳐지고 있다. 감히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지구가 아닌 것 같은 다른 행성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저씨가 풍경을 보며 "행복이란 말이야, 욕심내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더라고, 정말이야."라고 말을 한 뒤 한동안의 침묵으로 대화를 나눴다.


어느새 천왕봉에 도착했다. 참으로 절경이었고 떠오르는 태양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울컥임과 살아갈 에너지를 얻는 기묘함을 경험했다. 그렇게 말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들. 저마다의 염원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하나 둘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들은 또 다른 산으로 이동하는 일정을 가졌다며 우리와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반가웠고, 잘 살아가고 올해도 열심히 삽시다."라는 말과 함께 인사를 나눴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행복이란 욕심을 내면 얻을 수 없다"라는 이 말이. 내 삶에 많은 귀감을 주며 가슴 한편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하듯 인생이란 뜻하지 않은 만남과 대화로 더욱 풍요롭게 채워진다.


"나는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뜻하지 않은 귀감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이야 말로 내가 이곳에 글을 남기고 싶어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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