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셀프청탁 에세이
퇴사한다는 말은 이번으로써 네 번째였다.
2007년 회계법인 첫 입사 후 5년 뒤 그만두었고, 일반 기업체에서 일하다 또 5년 뒤 그만두었고, 그다음 회사에 다니다 11개월 뒤 그만두었다.
1년을 못 채우고 퇴사 소식을 부모님께 전했을 때, 엄마와 아빠는 크게 걱정하셨었다.
"그 회사는 아주 큰 대기업인데, 거길 왜 그만두니."
엄마와 아빠는 내가 전문직임에도 불구하고, 소속된 회사의 규모를 중시했다. 그 회사의 크기를 내 미래의 안정성과 동일시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 후 나는 작은 회계법인에서 보란 듯이 7년이나 일했다.
엄마와 아빠는 명절만 되면 때마다 회사 대표가 부치는 전복 선물과 연말마다 직원 가족들을 동반한 송년회를 보면서 '안심했다.'
그렇게 18년 간 네 번의 입사와 퇴사를 거쳐 나는 이제 절반의 자유인이 되었다.
회계법인에 소속되지만, 자유로운 신분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내가 수임하고 내가 일하고, 내가 가져가는 시스템.
엄마와 아빠는 마흔 살이 넘은 딸이 여전히 열아홉 시절 서울로 떠나보내던 심정 같으신지, 손을 잡으며 "잘 될 거야, 잘될 거다"라는 말을 나에게 읊조리신다.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당신들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내려 마치 기도하듯 하는 혼잣말이다.
사무실에서 힘차게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나 드디어 탈 서울이야!!!! 퇴사한다!!!!"를 외쳤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즐겁게 나누고 열흘 뒤, 나는 제주도로 떠났다.
신랑 없이 나 혼자 지내려 했지만, 도저히 혼자 여행하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아 엄마를 꼬드겼다.
쓸쓸한 여행이 아닐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는 갈수록 키가 작아지는 듯했지만, 얼굴 인상은 10년 20년 전보다 더 좋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마음이 편안하면 얼굴로 나타난다는데, 엄마는 내가 20대 30대이던 때보다 지금이 더 편안한 걸까.
"아빠랑 사이가 좋아져서 그래.
너희 아빠도 많이 순해졌어."
세상 어떤 말보다, 어떤 금은보화보다 엄마의 웃음소리와 웃는 얼굴이 그립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갱년기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는데, 그때의 괴로움은 지켜보는 가족들도 우울감에 잠식될 정도였다.
지금의 엄마는 나이는 더 들고 몸은 약해졌을지라도, 훨씬 더 건강하고 쾌활하다.
그런 엄마에게 감사하다.
'이제, 엄마가 아프다면 내가 언제든 내려갈 수 있겠구나.
엄마가 여행하고 싶을 때 내가 엄마랑 다닐 수 있겠구나.'
엄마가 갱년기 우울증과 싸우고 있던 시절, 나는 일은 서울에서 해야 하고, 엄마를 케어해야 하는 복잡한 역할 갈등에 부딪혔었다. 아빠는 직업의 특성상 멀리 떨어져 계셨기에, 엄마의 보호자는 자연스레 내가 되었다.
이번 퇴사는 나에게 '탈 서울' 이상으로 큰 자율성과 가능성을 열어준 것 같다.
비행기 타기 2시간 전.
너무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엄마한텐 모든 게 다 소중한 시간들이니, 기다림도 지겹지 않다는 엄마의 말이 뭉클했다.
앞으로는 엄마도 자주 보러 가야지.
회사 핑계, 일 핑계는 덜 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