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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맹드 Mar 23. 2023

침실 - 어둡지만 칙칙하지 않게

신축보다 구축 올수리(2)

     인테리어 시공을 의뢰하는 일은, 의 일기장 보여주는 일과 비슷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는 나의 실체들을 낱낱이 설명해야 니까.

"제가 이렇거든요."

조금씩 밀려오는 민망함은 덤이다.


그래도, 오래된 나의 습관이나 취향, 호불호들을 상세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국은 집의 디테일을 완성하는 핵심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원룸 주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침실 공간의 분리가 가장 그리웠다. 먹는 걸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저녁 요리 냄새가 밴 이불 안에서 깊이 잠들긴 어려웠다.

아파트 생활에서 내가 가장 먼저 기대한 것은 '잠의 정복'이었다.

어릴 때부터 잠자리에 예민한 아이였다는데,
난 아마 할머니가 되어도 그럴 것 같다.


잘 자기 위해서는 침실을 오로지 수면의 공간으로만 쓰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기능은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가령, 침대에서 세컨드 TV를 보겠다거나, 옷장을 들여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등의 포부 말이다.


톤은 최대한 차분하게,
아이템은 최대한 적게.

업체에 '어둡지만 칙칙하지 않은' 톤을 요청했, 세 가지 색상을 제안해 왔다. 

붉은빛이 담긴 베이지색, 노란빛이 담긴 상아색, 그리고 채도가 없는 회색이었다.

베이지색과 상아색은 산뜻하고 경쾌했지만, 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회색방이라.. 처음 디자이너님이 보내준 시안만 봤을 때는 긴가민가 했었다. 너무 과감한 선택 같았다.

회색으로 방을 덮어버리면,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마우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고객 집에 시공한 회색 침실 사진을 보자, 우려가 이내 사라졌다. 침구나 조명만 잘 선택하면 찮을 것 같았다.

방문, 벽지, 천장, 몰딩 모두 회색톤.
조명, 침구, 커튼은 흰색,
협탁과 침대 프레임은 진회색으로 꾸렸다.

채광 면적도 줄였다.

창문 세로 길이를 절반으로 줄이고 이중창으로 시공했다.

낮에는 출입할 일 없는 곳이고, 어차피 어둡기로 작정한 공간이었기에 이 선택은 주효했다.


그 외에 물건은 없다. 거울도, 서랍장도, 가전제품도 없다.

꽃 그림 하나와 베개 향수만 존재한다. 그 마저도 모두 선물 받은 것들이다.


보이는게 다입니다

침실은 집주인만 드나드는 공간이다.

어쩌면 가장 숨기고 싶은 면을 간직한 곳이지 않을까.


침대와 커튼 설치까지 끝낸 날.

이제야 나의 내밀한 본모습과 잘 포개진 듯했다. 데칼코마니처럼 단정하게.


새 침실을 맞이하고
나는 더 이상 낮의 얼굴을 하고
어설프게 잠들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서만은, 아무도 모르게 침잠하고 싶은 나의 유약한 면을 내보여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밤이 두렵지 않은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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