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세계

봐주지 않는다구

by 김보


“부서 발령 났다. 잘 됐네, 보성 프로 입장에서도 리프레시일거야.”

올해의 마지막 근무 날 아침, 부장님은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부서 전배를 통보했다. 새로운 팀, 새로운 그룹, 새로운 파트로 멀리도 배치받았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 처음 이 부서에 배치받은 이후로 2년 간 내가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최근 몇 달 간은 더욱. 마음 속으로는 이 지옥에서 드디어 탈출이다 쾌재를 불렀지만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르기에 슬 눈치를 살폈다. 어찌 되었든 ‘리프레시’라는 말을 통해 그는 나름대로의 이해와 응원을 건넸고, 올해의 마지막과 2년 간의 이 부서의 생활을 인수인계와 함께 정리하며 간만에 속 편한 퇴근을 했다.


정이 낀 연휴 요 며칠 간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그 중 떠오른 대부분은 지난 두 해 간 이 부서에서의 생활이었는데, 그렇게 하나 같이 어설펐던 기억만 난다. 우리 회사는 부장급 아래로는 ‘프로’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이게 직급의 구분이 없으니 누가 신입인지 과장인지(겉모습을 제외하고는) 짬을 알 수가 없다. 누구나 전문성을 가지고 책임 있게 일하라는 회사의 의도가 일부 적중했다. 나는 입사하자마자 부담스럽게도 ‘김프로’가 되어 대행사들을 관리하는 ‘광고주’라는 시니어급의 업무를 덜컥 맡아버렸다. 대행사의 누군가는 나를 대리라고도, 때로는 과장이라고도 불렀다. 우습게도 그러면 나는 괜히 얕보일까봐 몰래 대리인 척, 과장인 척을 하다가, 잘 모르거나 불리할 때는 ‘저, 사실 제가 신입사원이라...’하고 히든카드를 슬쩍 내밀었다. 결국 ‘한번만 봐주세요’란 뜻이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에서도 신입이라는 히든카드는 때때로 잘 먹혔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갖고 있는 초보시절에 대한 공감. 고백하건대, 가끔은 신입사원이라는 카드를 이용해 슬쩍 손에 힘을 놓았던 적도 있었다.


2년 전 신입 시절 첫 팀 월례회 때, 우리 팀은 100명이 넘었다.


어설펐던 기억들의 대부분에는 그렇게 손 놓은 내 모습이 있었다. 한번만 봐주세요, 아쉬운 소리로 흐지부지 마무리를 짓고 나면 엎드리는 쪽은 언제나 나다. 책임 면피는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 그래 내가 졌어. 이 짐 좀 대신 들어줘. 몇 번의 반칙성 면피가 쌓여서 이제는 큰 짐이 아니더라도 작은 짐에도 신음하는 약골이 된다. 약한 모습이 될 때마다 주로 회사를 미워하고, 스스로 자존심을 깎고, 그렇게 고통 받은 2년은 스스로 만든 지옥이었다. 낯선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한번만 봐달라며 상황을 회피했었나. 도망친 곳에 역시나 낙원은 없다.


내일 아침, 아무도 나를 모르는 새 부서로 첫 출근을 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프레시맨이 아니고 3년차 임직원일 뿐이지만, 이건 내게 찾아온 절호의 리프레시 기회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다시 지옥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한번 봐주세요’가 아니라, ‘한 수요!’ 던질 수 있는 배짱이 필요하다. 나를 던져보는 수 밖에는 없겠다. 그게 나를 회복할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김프로고, 프로의 세계는 봐주는 법이 없으니까.




오늘자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남대교 위에서 버려진 초보운전을 발견했다. 누군가 드디어 초보딱지를 떼었나 보다. 의도인지 사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나보다 한 발 빨리 봐주지 않는 세상으로 갔다. 지금쯤 도로 위에서 용감히 달리고 있겠다. 많은 빵빵거림을 견디면서. 허둥지둥 하면서. 나도 내일 허둥지둥 바짝 힘내야지. 한 수 배웁니다!


누군가 드디어 초보 딱지를 떼었나보다. 의도했던 아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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