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잠들면 숨소리부터 달라진다. 일정하게 높아졌다 낮아지는 고른 숨소리. 안정권에 들어섰다 싶으면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스탠드를 켠다. 두 아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은 낮 시간에 불가능했던 평화를 데리고 온다. 그 평화 속에서 나는 낮에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일을 하기도 하고 읽고 싶은 걸 참고 있었던 책을 펼치기도 하고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한다.
요새는 아이를 재우려고 누웠다가 같이 잠드는 날이 잦다. 아이를 재우려면 함께 깊은 어둠 속에 들어가 실제로 자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아이보다 언제나 그 어둠 속에 먼저 항복하는 건 하루치의 피로를 끌어안고 아이 곁에 누운 나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새근새근 콧소리를 내는 아이의 이마에 뽀뽀 한 번 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내 등 뒤로 비장함이 내려앉는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세상으로 들어간 이 시간의 소음 없음을 이용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애워싼다.
나는 왜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걸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을까. 돈을 벌어야만 나의 쓸모 있음을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내 안에 장착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빠가 만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라는 가훈은 그런 뜻이 아니었을 텐데. 내 아이를 돌보는 데 돈을 받는다면 나는 아마 더 성실히 내 아이를 돌볼지도 모른다. 받은 만큼의 가치를 다하기 위해 몬테소리 저리 가라 할 만한 프로그램을 짜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울지도. 불행히도 내 아이를 키운다고 누가 나에게 돈을 주지는 않으므로 나는 꾸역꾸역 돈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한다.
하루에 내가 번역하는 양은 여덟 페이지에서 열 페이지 정도다. 아이들을 돌보며 내가 할 수 있는 하루 적정치의 일이다. 일을 마치고 나면 한글 파일의 문서정보에 들어가 원고지 매수를 확인한 뒤 계약한 번역료에 맞춰 셈을 해본다. 이는 하루치 나의 노동을 값으로 환산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누군가가 우습다고 비웃을 이 유치한 의식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리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게 12년 전이다. 내가 아직까지 이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건 직업 뒤에 숨어서 양껏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하게 될지 모르겠다. 물가상승률조차 반영되지 않는 번역료를 보며 한숨 쉬는 일을 이제는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다른 직업을 기웃거린 적이 없지 않다. 방황의 끝에는 늘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온 나만 남곤 했지만. 그건 가슴이 머리보다 예민해서 이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이곳 미국에서 아이 친구들 엄마를 만나보면 전업주부가 거의 없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아이의 같은 반 친구와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났는데, 그 엄마에게는 그 아이 말고도 위로 두 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딸 세명을 키우는 엄마는 피곤에 찌든 모습에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당연히 전업주부일 거라 생각한 건 나의 단단한 착각이었다. 흔한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는 남편도 회계사고 자기도 회계사라는 말을 흘렸다. 힘주어 말한 것도 아니고 별 일 아니라는 듯 슬쩍 흘린 뒤 또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그녀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일하는 덕분에 금요일 오후에 아이들과 놀이터도 나올 수 있었을 엄청 바쁜 엄마였던 것이다.
미국에 온 이후로 나는 매 번 속는다. 어디서든 누굴 만나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만 미국에서는 정말이지 그렇다. 누가 부자인지, 누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나라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또다시 각성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책상 앞에 앉게 된다. 원래 읽으려던 소설책을 도로 꼽고 괜시리 허리를 쭉 펴본다. 오늘 밤은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하루에 일하는 시간을 늘린다 해도 내가 베이비시터를 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돈을 벌 수는 없을 거다. 지금 버는 돈을 꼬박 갖다 바친다 해도 시터를 고용할 수 없을 만큼 이곳의 인건비는 비싸다. 게다가 내가 힘겹게 번 돈을 그런 식으로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다. 모든 돈은 힘겹게 벌어진 것이지만 두 아이를 등에 엎다시피 한 상태에서 일을 하는 지금의 나에게는 한 푼 한 푼이 눈물 나게 애틋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내가 아이들을 곁에 두고도 끝끝내 일을 놓치 못하고 밤늦은 시간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건 돈을 벌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자아의 욕망을 외면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나는 없고 엄마로서의 나만 존재하는 낮 시간에 미처 채우지 못한 퍼즐 한 조각을 끼워맞추기 위해. 그 모든 시도는 결국 나를 적당히 포장하는 일에 불과할 뿐일 테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누군가의 눈에 목격되기를 바라는가 보다.
미국 엄마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합리화하기 위해 구구절절 말이 많았다. 추리닝 속에 감춰진 그녀의 쿨내를 내 것으로 훔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