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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l 06. 2021

먹고사니즘

금요일 저녁. 배달의 민족이 없는 미국인지라 내 핸드폰에는 Yelp, Ubereat, Sealmess, Grabhub, Doordash 따위의 앱이 깔려 있다. 사실 가장 먹고 싶은 건 다양한 메뉴를 자랑하는 한국의 분식이지만 그나마 이마저도 없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하소연을 들은 후에는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카레 당첨. 지난번에 주문했던 Ubereat에서 결제를 하고 음식을 기다렸다. 곧이어 어떤 흑인 여자가 음식을 픽업하러 가는 중이라고 알람이 떴고 금방 오겠거니 했다. 그런데 도착 예정 시간이 아무래도 너무 늦었다. 43분이나 걸린다는 게 믿기지 않아 설마 걸어오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설마가 진짜였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음식은 오지 않고 내가 그 무거운 걸 들고 걸어오고 있을 여자 걱정(내가 왜 거기까지...), 식고 있을 음식 걱정, 배고픈 위 걱정을 하는 동안 도착 예정 시간은 찔끔찔끔 늦어졌다. 주문한 지 2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음식이 오지 않자 참다 참다못한 신랑은 주문을 취소했다.


신랑이 급하게 픽업해온 타이 음식을 먹으며 사후 처리는 어찌 되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음식을 어떻게 되는 거고 그 여자는 어떠한 대가를 받게 되는지. 사이드잡이나 전업으로 대리운전을 하는 한국 사람들처럼 이곳 사람들도 우버나 리프트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수입을 꾀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자동차가 없는 사람들도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이용해 음식 배달 알바를 많이 하는데 걸어서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까 그 여인네는 튼튼한 두 다리를 믿는 건가, 혹시 유모차를 밀면서 그 아래 짐칸에 실어오나, 혹 별다른 수입이 없는 싱글맘은 아니었을까, 팟씨유가 입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신랑은 자기도 나중에 사이드잡으로 그거나 하면 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나는 씁쓸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의 직업을. 내가 생각하는 이 직업의 가장 큰 장점은 땡볕에 나가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내가 아무리 돈 조금 준다고 징징대도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물건을 배달하다가 그 무엇과도 바꿔서는 안 될 소중한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게 요즘 세상이니까.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우선순위가 전복되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연봉 몇 억 이런 얘기를 들으면 과연 책 번역으로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게, 연봉 1억을 달성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궁금해진다. 다행히 먼저 이 길을 간 선배들께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자신들의 경험을 전해주신다. 연봉 1억 원에 도전하셨던 박산호 번역가님, 말도 안 되는 분량을 소화하며 한 달에 천만 원을 버셨던 권남희 번역가님. 결론은 두 분 다 몸이 상할 대로 상하셨던 모양이다.


하루에 10시간 번역을 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머리가 터지고 어깨 근육이 파열되지 않고도? 두 분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한다. 두 분은 몸소 실험한 끝에 우리 후배 번역가들에게 진리를 전달해주셨으니 그 진리는 번역이 아무리 좋아도 실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더라도 번역은 절대로 무리해서 하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오전에 네다섯 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2-3시간 정도까지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보통 3-4시 정도까지 하면 딱 좋더라. 물론 돈을 더 벌려면 무리할 수 있지만 작년 여름에 욕심을 내서 동시에 세 권을 진행하다가 머리에 쥐가 나는 경험을 한 이후로 가능하면 한 번에는 한 권씩만 번역한다.


홍한별 번역가는 오전 3시간만 일한다고 하시니 부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더욱 부럽게도 원하는 책만 맡으신다고. 번역가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들어오는 일을 웬만하면 전부 받는 사람과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만 고집하는 사람이다. 대부분 후자이고 싶지만 뻔한 이유로 전자에 가까운 상태로 일하고 있는 않을까.


로또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확률이 지극히 낮지만 내가 로또에 당첨되어 돈벌이로서의 번역에서 멀어진다면 나도 후자의 길을 걷고 싶다. 물론 그때도 번역을 할 마음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1년 전에만 해도 그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더라도 당당하게 번역을 하겠다고 떵떵거렸지만 이제 와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장담할 수 없다. 세상에 할 일이, 해 보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돈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한 채 방구석에 처박혀 처량하게 번역만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돈을 전부 기부하는 아름다운 내가 된다면 또 다른 그림이 나오겠지만 그것 또한 로또에 당첨될 확률만큼 낮은 일이므로 생각하지 않으련다.


프리랜서의 벌이는 회사원보다 확실히 변변치 않다. 하지만 회사를 다녀본 나는 회사에서 꼬박꼬박 주는 높은 연봉에 포함된 다른 희생들을 잘 알고 있기에 군더더기 없는 나의 현재 벌이에 만족한다(물론 번역료에 만족하지는 않는다). 쓸데없는 회의에 참석하거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듣고 있어도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일이 지닌 값어치는 충분하다. 나의 하루를 스스로 계획할 수 있는 자유는 또 어떻고.


물론 성장 단계가 불확실한 프리랜서의 생활이 불안하기는 하다. 내가 지금 어떠한 단계를 밟고 있는지 그 누구도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사원을 지나 대리, 과장, 차장, 부장으로 승진하며 각 단계마다 나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으나 프리랜서는 그런 게 없다. 프리랜서 번역가인 나는 부지런히 번역하는 책의 권수를 늘려갈 뿐이다.


지금의 나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하다. 하지만 내가 주 수입원이 될 수는 없다는 한계는 여전하다. 하루 종일 번역만 하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인 데다 그럴 수 있는 체력도 없다. 다만 이제는 내 몸값을 지키며 일하고 싶다. 그래야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도 면목이 서고 나 자신에게도 덜 미안할 것 같다.

 

번역료를 깎으려는 이들의 입장도 물론 이해가 된다. 다들 사정이 힘들고, 또 뭐든 일단 깎고 보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므로. 하지만 번역가들이 받는 번역료가 투입되는 노동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다는 사실, 그리고 번역하는 몇 달 동안에는 수입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 번역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줬으면 한다. 정성을 다해 만든 비싼 제품에 흔쾌히 지갑이 열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한 번역에도 모두의 지갑이 활짝 열리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가 번역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끔 생각한다. 아이의 꿈은 여러 번 바뀌겠지만 번역가라는 직업에 한 번이라도 마음을 준다면 마음이 철렁할 것 같긴 한다. 안 된다고 말리면 더욱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는 걸 잘 아니까 불안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 시기를 잘 건너야 할지도. 일단은 나의 이 시기부터 잘 건너고.


https://taling.me/Talent/Detail/3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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