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들이 문장 위에서 춤을 춘다.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단어를 나는 자주 놓치고 만다. 번역은 달게 삼키고 쓰게 토해내는 일. 읽는 사람이 내가 삼킨 걸 모르게 만드는 일, 토해낸 것만으로 완전체가 되게 하는 일.
번역한 문장을 다듬는 건 음식을 조리며 적당히 간이 베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문장의 틈새에 긴장이 생기고 단어들이 혹은 문장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나오면 오케이다. 물론 일부러 서로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싶을 때도 있다. 같이 사진을 찍으라고 세워두면 한 뼘 정도 간격을 둔 채 포즈를 취하는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처럼 바람이 통하도록 두는 것이다.
물론 매 번 성공하는 건 아니다.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글자를 옮기는 사람>, 다와다 요코”.
아이가 토막말을 내뱉어도 엄마인 나는 용케 알아듣는다. ‘같이’, ‘엄마’, ‘잠 자’만 듣고도 엄마랑 같이 자자는 말이구나, 알아듣는다. 엄마가 독자라면 세상 친절한 독자일 테다. 그 대척점에 번역서를 읽는 독자가 있다. 그러니 이 단어들을 잘 엮어서 독자 앞에 차려내야 할 거다. 그들의 예리한 지적에 비참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설픈 번역가일 때가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기도 했고 이 정도 돈을 받고 이 정도로 시간을 투자해야 하나, 저울질하는 못난 번역가이기도 했다. 연이어 들어오는 역자교를 보며 내가 여기서 멈췄었구나, 더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선을 긋고 말았구나, 이런 뉘앙스인데 그걸 살리지 못했구나, 반성했다. 잘해보고 싶은데 고작 한 걸음밖에 나가지 못한 결과물 앞에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가 자책하기도 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주더라.
번역료가 (너무 더디기는 하지만) 조금씩 오르고 또 먼저 손을 내미는 상대가 하나 둘 생기면서 사랑이란 것이 다시 냉소의 자리를 차지하는 때가 찾아온다.
어치피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걸음밖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간혹 한 걸음 뒤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어릴 때 계단을 뛰어오르듯 두 걸음 혹은 세 걸음씩 훌쩍 뛰어오르기도 하니까.
올해도 많은 책을 번역했다. 내년에도 그럴 거라 믿는다. 나는 아직 이 일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