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뜨끈한 핏덩이가 가슴팍에

by 물고기자리

첫째 아이를 출산한 뒤 간호사가 들고 온 식판에는 얼음물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아 그 옆에 놓인 딱딱한 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뭐 다른 거 필요한 거 있냐고 물었다. 따뜻한 물은 글렀다 싶었다.


“음.... 사과? 과일이 먹고 싶은데.”


간호사는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병원에 신선한 과일은 없다고 했다.


“과일 후르츠는 있는데 그거라도 갖다 줄까?”


“어, 그러면 좋지, 고마워.”


미국에 와서 한 번도 내 돈 주고 사 먹을 생각을 못한 음식이었다. 한참 후 신랑은 집으로 가 엄마를 데리고 왔고, 엄마와 함께 미역국이 왔다. 엄마는 보온병 뚜껑에 미역국을 덜어 나에게 건넸다. 엄마가 끓인 미역국은 맛있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낯선 상황과 환경 속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그 맛만이 텅 빈 속을 달래주었다.


진통제를 넉넉하게 투여해 주는 미국 병원 덕에 출산 당시의 고통은 없다시피 했다. 감각이 없던 터라 의사의 지시에 따라 힘을 주는 과정을 반복했다.


“얼굴에 힘을 주지 말고 아래에 힘을 줘!”


신랑과 의사가 합창하듯 말했지만 애를 낳아본 사람은 알 거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얼굴에 힘을 안 주기가 말처럼 쉬운 줄 아나. 의사는 결국 흡착기를 이용해(신랑 말에 의하면 변기를 뚫을 때 쓰는 도구와 비슷하다고 했다) 아이를 뽑아냈고 아이는 흡착기 때문에 머리 모양이 아직도 살짝 콘 헤드에 가깝다. 미안해 딸아.


경쾌하고 쾌활한 여의사는 자궁문이 빨리 열리도록 처음부터 촉진제를 쓰는 등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상태를 보아온 담당 의사가 아니었다. 나의 담당의는 다른 여의사 2명과 3교대로 출산을 담당했는데 내가 출산하러 병원에 갔을 때에는 내 담당의의 교대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에 병실을 찾은 의사는 사실 또 다른 의사였다. 그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미안하지만 속으로 기겁했다. 잠을 못 잤는지 상당히 초췌한 몰골에 머리는 산발을 한 늙은 여의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환자를 보고 웃지도 않는 그 모습은 절로 이를 악물게 했다.


무통주사를 맞고 누워 있는데 병실 문이 열리더니 다른 의사가 들어왔다. 그 사이 교대 시간이 바뀌어 새로운 의사가 나의 출산을 담당하게 된 것.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그로부터 2년 반 후 그녀는 내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된다. 똑같이 초췌한 몰골에 산발을 한 채로.


둘째 때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흡사 마녀와도 같은 모습의 그 의사는 알고 보니 굉장히 자연적인 출산을 선호하는 의사였다. 촉진제를 놓는 대신 자궁문이 자연스럽게 열릴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처음에는 하염없이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방법에 신뢰가 갔다. 출산 과정 역시 하염없이 기다려줬고 흡착기는 쓰지 않았다. 덕분에 아들내미는 머리가 동그라니 아주 예쁘다. 딸아 다시 한번 미안.


첫째 때 하지 못한 스킨 투 스킨도 그 의사 덕분에 제대로 했다. 스킨 투 스킨케어란 캥거루 케어라고도 불리는데 엄마와 아기가 서로 맨살을 맞대고 감싸 안는 방법을 말한다. 원래 미숙아들을 위한 치료 방법이지만 미숙아뿐만 아니라 모든 아기들이 스킨 투 스킨케어를 통해 정서적인 안정을 받을 수 있다고. 이 병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엄마 품에 안겨줘 스킨 투 스킨케어를 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 때 잔뜩 기대하고 있었건만 의사는 아이가 나오자 탯줄을 잘라 어디론가 데리고 간 뒤 한참 지나서야 내 품에 안겨줬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 방심한 사이, 의사가 갓 나온 뜨끈뜨끈한(?) 아이를 내 가슴팍에 척하고 얹어줬다.


‘앗 이건 뭐지.’


뜨끈뜨끈한 순대가 접시 위에 얹힐 때 접시는 그런 느낌일까. 말로 설명하기 무진장 힘든 감정이었다. 드디어 엄마 자궁 바깥으로, 이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아이는 아직 탯줄을 단 채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내 가슴 위에서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 뜨끈한 덩어리가 해낸 일은 놀라웠다. 자그마한 몸과 접촉하는 순간, 짜고 울컥한 것이 눈가에서 솟아났다. 나의 일부였다가 이제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닌 게 되어버린 존재. 9달 내내 내 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극명하게 알린 게 너였구나. 절대적인 끌림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오며 속이 저릿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던 순간. 말 그대로도, 은유적으로도 그랬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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