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주 Jul 11. 2019

아빠 그리고 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아빠가 돌아가셨다. 새벽 12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언니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셨대”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꿈같은 일이었다. 



청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스무 살 이후, 아빠와 매일 통화를 했다. 적게는 한 통, 많게는 하루 서너 번이었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밥은 뭘 먹었냐, 오늘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빠의 주 관심이었고, 나 역시 시시콜콜하게 내 하루를 알렸다.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 애 아빠랑 싸웠다, 요즘 회사 일이 힘들고 건강이 좋지 않다 등. 십 년 이상을 이어진 이 통화는 내 하루의 일기 같은 것이었다. 좋은 일도, 싫은 일도 그 날의 감정을 적어내듯 아빠와 함께였다. 그럼 아빠는 늘 이렇게 얘기했다. “둥글게 살아야지. 그런 것 가지고 너무 애쓰거나 걱정하지 말고” 


아빠의 죽음이 여전히 꿈같은 이유는 그날도 아빠와 통화를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거제도에 친구들과 놀러 간다고 했다. 부부모임이었고 엄마도 함께였다. 3주 전에 감기 몸살이 걸렸을 뿐, 아빠는 평소 아픈 곳도 없는 분이었다. 나는 죽음의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에 의하면 섬 구경도 잘 하 고 저녁도 한 그릇 다 비우신 후에 잠을 주무시다 그렇게 되셨다고 했다. 갑자기 땀이 났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사람들을 찾으셨단다. 남녀 숙소를 따로 잡은 탓에 엄마는 뒤늦게 아빠를 보러 갔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보는 순간 눈 한번 마주치고 “억”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셨다. 119로 급하게 옮겼지만 아빠는 숨을 쉬지 않았다. 병원에서 받은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평소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특히 우리 아빠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다른 사람 은 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돌아가셔도 우리 아빠만은 평생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아빠는 70 생일을 앞두고 계셨다. 거제도에 간다고 할 때 따로 용돈을 안 드린 이유도, 그 돈까지 모아 해외여행을 보내드려야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었다. 그 돈 몇십만 원을 부쳐드렸다면 새 옷이라도 입고 가셨을 텐데, 그 돈이 뭐라고 그랬을까. 이런 자책은 끝이 없었다. 매일 통화를 했는데, 죽음의 기운을 왜 몰랐을까. 혹시 숨소리가 조금 거칠었던 걸 놓친 게 아닐까. 아빠가 감기 몸살이 걸렸다고 했을 때 바로 내려갔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놈의 이 글쓰기가 뭐라고 왜 한 주를 늦추어가며 집에 내려가는 걸 미룬 걸까 등.


이 나쁜 년, 이 나쁜 년, 이 나쁜 년. 후회는 끝이 없었다. 


죽음은 반성과 참회만을 만든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아빠의 3일 장 내내 누군가를 원망했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아빠가 살아온 날들, 친구 관계, 직장생활 등을 모두 알고 있었다. 처음엔 외갓집 식구들이 조금 미웠다. 아빠는 엄마와 결혼한 후부터 외할머니와 엄마의 세 동생을 돌보았다. 엄마와 열 살 터울 이상이 나던 이모, 삼촌들은 대학에 갈 때도, 시집 장가를 갈 때도,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도 늘 아빠를 찾았다. 난 엄마의 관심이 늘 외갓집에 쏠려있다는 생각에 불편하고 화가 났었다. 그래서 툴툴댔다. 외가 식구들이 애를 쓰고 위로를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굴었다.


조문을 하러 온 사람들 중, 미운 사람은 더 많았다. 애를 보는 문제로 우리 집과 큰 다툼이 있었던 시부모님, 아빠의 승진 시기마다 발목을 잡았던 직장 동료, 아빠에게 돈돈돈을 외쳤던 지겨운 친척들과, 매번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했던 지인들까지. 나는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할 때 파투를 놓거나 소리라도 한번 후련하게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쩐지 아빠가 내 옆에서 손을 꼭 잡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해라. 다 지나간 거야. 둥글게 둥글게 살아야지” 평생을 부처처럼 누군가에게 주기만 했던 아빠의 목소리가 나를 멈췄다. 하긴 다 지 나간 거였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그 사람들 모두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속으로 계속 울었다. 이렇게 또 그냥 지나가는구나 하는 깊은 허무함 때문에. 



아빠를 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도 그는 내 지갑 속에서 활짝 웃고 있으며, 핸드폰 동영상을 틀면 손주 손녀들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결혼한 지 6년이 되었지만 나는 남편보다 아 빠를 더 의지했던 것 같다. 아빠는 내게 이성도 아니요, 그냥 아버지도 아니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무조건적인 내 편이었으니까. 딱히 잘나지 않아도, 엄청나게 많은 걸 해 드리지 않아도, 아빠는 언제나 내가 제일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조문을 하러 온 아빠의 친구들도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자네가 둘째 딸인가? 아버지가 정말 자네를 예뻐했어. 늘 믿고 생각했지” 


아빠는 더 좋은 곳에서 누구보다 좋은 일을 하실 거다. 그깟 승진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은 곳에 가겠다고 정치꾼들과 치열하게 다투지 않아도, 아빠를 먼저 알아봐 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세의 인연이 여기 까지라면 여기 까지겠지만, 언젠가 나도 하늘나라에 가게 될 테니 그때까진 잘 버텨야겠지.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그립지만, 장기 출장을 가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 우리는 단지 떨어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 생각한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흰나비도, 갑자기 집에 날아든 이름 모를 새도, 아빠가 나를 위로하는 신호라고 생각하며 유심히 본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만나면 반드시 이별이 있지만, 언젠가는 곧 만나게 될 것이니. 



은퇴하신 아빠가 심심하다고 하셔서, 원래는 아빠와 유튜브를 하는 내용을 쓸 생각이었다. 71살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가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치는 것처럼, 아빠에게도 제2의 청춘을 찾아주고 싶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기획서를 말하며 웃곤 했다. “엄마랑 다투는 일상을 찍어보는 건 어때?” “아빠 외국 여행 좋아하니 명우 씨의 영어 도전기로 해 볼까?” 등. 소재는 정말 다양했다. 단지 그 주인공이 사라져 아쉽고 슬플 뿐이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아빠를 언젠가 기쁘게 뵙고 싶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은 언젠가 희석될 것이다. 둥글게 둥글게를 외친 아빠의 인생론처럼 누군가에 대 한 미움도 함께 사라져 갈 것이다. 삶과 죽음이 정말 한 순간이기에 나는 내 인생의 2막을 어떤 순간들로 채워가야 할까 많은 고민이 든다. 아직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어떤 딸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내게 아빠는 갑자기 너무 많은 숙제를 남겼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숙제. 


죽음은 이처럼 누군가에게 거울을 남긴다. 나는 아빠만큼 넉넉하고 포용력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손해를 보고 산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많은 부분들, 그래서 너무 속상했던 그 부분들까지 내가 이어받아야 할지는 정말 미지수다. 아빠의 품격은 죽음을 통해 재 평가되었지만, 나는 인간적이지 않은 부분까지 굳이 눈감아 주고 싶지는 않다. 자애롭지만 강단이 있는 사람. 그게 아빠의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그래서 조금은 또 다르게 살고 싶은 내 삶의 목표 같다.   



분명한 건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당당하게, 솔직하게, 무엇보다 치졸하지 않게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디테일은 바뀔 수 있어도 우리 아빠의 DNA는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까. 나는 나이기 전에 결국 우리 아빠의 딸이다. 아빠 너무 사랑했어. 우리 꼭 웃으며 다시 만나자.

작가의 이전글 도대체 연애는 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