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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묘한 Jun 14. 2024

기묘한 레시피 ep.055 & 와인 페어링

기묘한 오리 크림 리조토

나의 ex 중 한 명과 썸을 타던 시기였다. 

이미 내가 구멍투성이에 손이 보통 많이 가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그는 나이답게(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연상이었다.) 내게 접근(?) 했다. 어느날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온 그는 큰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다. 꽃도 아니고 와인도 아니고 진짜 큰 상자를 들고 온 그는 세상 무심한 듯 내게 그걸 휘이 건네주고 가버렸다. 그건 다름 아닌... 밥솥이었다. 10인분은 거뜬히 할 수 있는 큼지막한 전기밥솥. 그 당시 내 집에는 쌀도 밥솥도 없었다. 한 4~5년 정도 쌀을 비롯한 한식을 안 먹던 시기가 있었는데, 다시 쌀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굳이 집에 밥솥이 필요가 없었던 나는, 이 폭탄을 앞에 두고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며칠이 지나고 그가 또 찾아왔다. 어깨에 뭘 짊어매고 헉헉대면서 나타났는데, 이번엔 쌀 포대를 이고 왔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그 사이즈를 기억해 보면 10kg도 아니었던 것 같다. 도른자인가... 평생 먹을 것 같던 양의 그 쌀과 평생 안 쓸 것 같던 그 밥솥으로 나는, 아니, 그와 나는 참 많은 끼니를 먹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그 밥솥은 어디 구석에 처박혀 짐덩이가 되었고, 난 늘 솥밥을 해먹게 되었다. 그 덕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음 남자친구들과 내 친구들이 받았지만. 솥밥을 해먹는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간편하면서도, 귀찮으면서도, 맛있는지. 양파 같은 매력의 누군가를 만나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 심정만큼이나 솥밥은... 그렇다.


매번 솥밥을 해 먹을 만큼 난 부지런한 인간이 아니다. 큰 솥에 여러 끼니의 밥을 해서 소분하고, 차곡차곡 냉동을 해두고, 때마다 데워 먹는다. 내가 이렇게 밥에 연연하는 사람이 되다니. 그놈 탓이고, 그분 덕이다.


그래서 오리 백숙을 만들 때마다 난 밥을 찐다. 솥밥을 하듯. 내가 사랑하는 오리 백숙의 백미인 녹두죽을 위해. 평소에 녹두를 먹을 일이 많지 않으니, 오리 백숙을 할 때마다 녹두와 찹쌀을 적당히 섞어 찌듯이 익히는데, 한 번에 상당하게 많은 양을 만들고 솥밥을 하듯 소분한다. 된 밥 정도의 질감이 나오는 그것으로 밥으로도 먹고, 죽을 만들고, 리조또도 만든다. 깊게 끓인 오리 육수가 주는 풍미와 찹쌀이 주는 점성과 녹두만의 구수함, 유제품들이 주는 부드러운 고소함이 더해진 이 리조또는 세상 유일하면서도 기묘한, 레시피일 것이다. 


오리 백숙의 녹두죽처럼, 연애의 백미는 자기 발견과 발전에 있다. 자기성찰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 십수 년은 족히 걸릴 일을,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면서 겪는다. 몰랐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나를 발견하고, 진짜 싫지만 받아들이고, 힘들지만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과정. 혹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인간인지 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거의 유일한 과정. 나라는 휴먼빙이 발전하는 과정을 라이브로 보는 거의 유일한 과정.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해야 한다.


<기묘한 오리 크림 리조토>


재료: 기묘한 오리 백숙(#기묘한레시피_ep054)의 녹두밥/죽 한 컵, 오리 육수 한 컵, 생크림 2/3컵,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페코리노 로마노 2/3컵, 마늘 3개, 샬롯 2개, 부추 1/2줌, 소금, 후추

+ 트러플 오일 (이미 녹두밥에는 건표고의 향이 가득하다. 트러플 오일 조금으로 풍미를 훨씬 업 시킬 수 있다.)


1. 마늘을 편 썰고 샬롯은 슬라이스한다.

2. 깊이가 있는 팬에 오일을 두르고 마늘-샬롯 순으로 볶는다.

3. 오리 육수를 2에 넣고 끓이다가 녹두밥을 넣는다.

4. 자작하게 졸아들면 생크림을 넣어 중약불에서 끓인다.

5. 부추는 챱하고 치즈는 그레이터를 이용해 갈아준다.

6. 부추의 2/3과 치즈의 2/3을 4에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7. 소금, 후추로 간을 한다.

8. 플레이팅을 하고 남은 부추와 치즈를 얹는다.

9. 취향에 따라 트러플 오일을 더해 서브한다.

 

기묘한 와인 페어링: 기묘한 오리 백숙과 미국 오레건, 특히 Willamette Valley, 그중에서도 Chehalem Mountains 피노누아의 마리아쥬를 추천한 것처럼 기묘한 오리 크림 리조토 역시 피노누아와 멋진 마리아쥬를 보인다. 여기에 기묘한 킥인 트러플 오일을 더할 경우라면 이탈리아 피에몬테네비올로를 추천한다. 이탈리아어로 '안개'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네비올로는 이탈리아의 북부, 특히 랑게 지역의 서늘한 기온, 깊은 안갯속에서 자라나 붉은 베리류, 제비꽃, 장미, 야생 허브, 담배, 특히나 특유의 버섯 향이 근사하다. 어린 네비올로라면 기묘한 오리 크림 리조토에 가벼운 치즈와 허브를 곁들이고, 잘 숙성된 네비올로라면 기묘한 오리 크림 리조토에 쿰쿰한 하드 치즈와 허브, 그리고 트러플 오일을 더해 페어링 한다. 아, 입맛이 절로 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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