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오리 백숙
너도 마흔 넘어봐.
언니들이 어찌나 겁을 주던지, 30대의 나는 40이 기대가 되면서도 살짝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마흔이 되고도, 넘고도, 언니들이 얘기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들도 몰랐겠지. 코로나.
전생에 나라를 대차게 팔아먹었나 싶게 겪었던 일들로 마음이 찢어질 대로 찢어진 상태에서 코로나라는 염분 덩어리가 그 마음 구석구석 참도 정성스레 발려져서 거의 피지컬리 멘탈리 파괴된 난,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사람이 입맛을 잃는 게 이런 거구나. 태어나서 입맛이 없었던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그걸 잇는 세 번째 노입맛의 경험은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이 기회에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은근 즐기던 초반과는 달리, 중반 정도 되니 이렇게 아플 수가 있구나, 싶었다. 미친 에너지인 아이가 한 번 아프면 주변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을 하게 된다.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어야 했는데, 삼시세끼 밥을 해서 먹는 나는 아프면 참 답이 없다. 배달음식에 취약한 나를 위해 그 일주일간 내 친구들은 훌륭한 배달음식들로 나를 살려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능이버섯이 들어간 오리 백숙인데, 녹두죽이 함께 왔다. 보통 오리 백숙은 4~5명이 먹는 거 아닌가? 집에서 먹으면 7~8인분은 될 것 같다. 그 오리 백숙을 거의 2주 동안 먹은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난 살아났다.
루틴처럼, ptsd처럼 여름~이른 가을에 펼쳐지는 나의 지랄병은 올해 유난히도 심히 왔다. 약도 없고 그냥 날이 추워지기만을 기다렸다. 가장 빛나고 아름다울 그 날씨에 내가 사랑하는 산에도 못 가고, 애정 하는 친구들도 못 만나고, 좋아하는 와인도 못 마시고, 그냥 시름시름 앓았다. 저 많은 와인은 다 어쩌지, 다시는 와인을 마시고 싶은 생각도, 산에 갈 기력도 안 생길 줄 알았던 날 두고 친구들은 이제 니가 드디어 그 나이에 맞는(?) 경험을 하는 거라며, 살짝 좋아도(?) 하는 것 같았다.
살겠다고 오리를 사다 백숙을 끓였다. 한약재 냄새는 싫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향신료들을 넣고, 질 좋은 오리로, 기묘한 스타일로. 나도 먹고, 기력 챙겨 줄 동친이랑도 먹고, 죽도 먹고, 리조또도 먹고(이건 다음 레시피에서)... 산 속 마녀가 주문을 외우며 마법의 슾을 끓이는 것처럼 푸~욱 끓여 낸 오리 백숙은 확실히 기묘한 힘을 발휘한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 보름달이 뜰 때쯤 산에 가자고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렇게 싫어하는데 굴하지 않고 계속 물어본다. 산에 갈래? 에너지 죽으려면 내년 루틴까지 좀 걸릴 테니, 친구들을 더 잘 먹여야겠다고 다짐한다. 오리 먹자, 얘들아... 헤헷~ ^_______^
<기묘한 오리 백숙>
재료: 무항생제 통 오리, 대파 2 뿌리 (흰 부분만), 대추 7알, 마늘 15알, 건표고버섯 한 주먹, 녹두 2.5컵, 찹쌀 1컵, 월계수잎 2개, 팔각 3개, 정향 3개, 통 후추 15알, 삼베 주머니 큰 것 1개, 삼베 주머니 작은 것 1개, 1회용 다시백 1개, 요리실, 부추
1. 녹두와 찹쌀은 잘 씻어 30분 정도 불린다.
2. 오리는 날개와 꼬리 쪽은 잘라내고, 목과 다리 쪽으로 보이는 기름은 되도록이면 모두 제거한다.
3. 뼈 안쪽으로 남아 있는 피나 덩어리진 부분 역시 최선을 다해 제거한다. 국물에서 냄새가 난다면 다 여기서 대충 한 탓이다.
- 무항생제 오리를 사면 대부분 상당히 깨끗이 세척되어 온다. 닭과 마찬가지로 뜨는 기름의 양이나 색도 다르다. 꼭 무항생제를 사자.
4. 월계수잎, 팔각, 정향, 후추를 다시백에 넣고 빠지지 않게 요리실로 묶는다.
5. 대파의 흰 부분, 대추, 마늘을 4의 다시백과 함께 삼베 주머니 작은 것에 넣는다.
6. 1의 녹두, 찹쌀, 건표고버섯은 삼베 주머니 큰 것에 넣는다.
7. 큰 팟에 5의 향신료 주머니를 넣고 뜨지 않도록 오리를 그 위에 얹는다.
8. 오리가 충분히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9. 그 위에 6의 주머니를 넣는다. 애초부터 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녹두밥을 쪄낸다고 생각하면 쉽다. 녹두 주머니는 물에 다 잠기게 하지 않는다. 1/3~1/2 정도만 잠기게 시작하면 된다.
10. 센 불로 시작하고 끓으면 중불, 그다음 중약불로 찬찬히 온도를 조절해가며 1시간 정도 끓인다.
11. 향신료 주머니는 건져내고, 녹두 주머니도 꺼내 녹두밥을 따로 보관한다.
12. 끓는 육수에 부추를 살짝 데쳐 부추와 오리를 함께 서브한다.
13. 녹두밥은 그냥 밥으로 먹거나, 육수에 넣어 죽으로 끓여 먹거나, 리조또를 만들어 먹는다.
- 리조또는 다음 레시피에서.
- 고기와 육수를 이용해 덕 누들 슾을 만들어도 좋다.
기묘한 와인 페어링: 기묘한 오리 백숙은 다양한 향신료들과 오리의 어우러짐, 부추의 향과 식감, 그리고 녹진하고 고소한 녹두죽 그 밸런스가 상당히 좋다. 괜찮은 미국 피노누아를 마실 때마다 드는 생각.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지?! 분명 구대륙 피노에 대한 굳건한 신뢰, 반면에 갖는 신대륙의 그것에 대한 아주 약간의 불신(?)이 주는 예상 밖의 서프라이즈. '잘 만든' 신대륙 피노가 주는 강렬한 인상은 구대륙 와인들이 주는 클래식한 뉘앙스와 신대륙 특유의 재기발랄한 킥이 만나 근사한 경험을 준다. 마치 기묘한 오리 백숙처럼. 기존에 우리가 먹던 약재 가득한 오리 백숙 대신 이국적인 향신료와 오리의 조화 같달까. 미국에는 아주 다양한 AVA가 있으니 사실 경험이 필요하다. 내게 잘 맞는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의 와인을 찾으려면. 미국 오레건은, 특히 Willamette Valley, 그중에서도 Chehalem Mountains의 피노는 가히 아름답다. 붉은 베리들의 싱그러운 향과 은은한 장미의 향, 봄날 촉촉히 젖은 숲길에서 느껴지는 젖은 돌과 흙의 내음 등은 과하지 않은 탄닌과 무겁지 않은 바디감, 부드러운 산미, 좋게 느껴지는 자연의 향들이 어우러져 기묘한 오리 백숙과 좋은 페어링을 이룰 것이다. 한식과 와인의 마리아쥬를 두려워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