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술이 될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병환으로 영국 유학 생활을 접고 온 나는 장사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장사에 소질이 보였고, 아빠를 도와 타이어 대리점을 하며 부업에도 성공적이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가 요리를 배우자고 했다.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소위 난 피 끓는 20대였고, 무서운 게 없었던 나에게 불운이란 피해 가면 되는 대상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고 걸레를 빨아 청소하려 둘러보는 중, 애지중지하는 나의 진열대에 큰아버지가 어디에서 사 왔는지 모를 싸구려 향이 나는 자동차용품을 나의 소중한 제품을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때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강하게 스쳤다.
일단 오픈 준비는 해야 하니 정성껏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맞췄다.
작업장 준비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직원에게 잠깐 담배를 피우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큰아버지를 기다렸다.
“이건 뭐예요?”
“나도 좀 벌고 살자. 한 칸만 날 주면 안 되겠냐?”
“약속은 약속이니까! 제가 여기서 딸랑 35만 원 받고 일하는 이유가 뭔가요?”
“웬만큼 벌었으면 같이 먹고살아야지.”라고 주장하는 큰아버지는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을 직원에게 꼬치꼬치 물어보았던 것 같았다.
“그럼 계속 여기에 두신다는 거죠?”
“...” 묵묵부답으로 몸을 돌려 좁은 사무실 안을 1/3은 차지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털썩 앉는 큰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고 벽을 보고 있었다.
“오늘부터 점심 식사는 저쪽 골목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합니다.”라고 하자 날 빤히 쳐다보셨다.
“그 큰 책상에 앉아계시면서, 서류정리, 고객관리, 거래처관리, 물건관리 내가 다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큰아버지가 밥을 하시든가 아니면 나도 좀 쉬어야 하니 밥은 사 먹지요.”라는 말에 휑하니 나갔다.
안 그래도 배달 보내면 함흥차사에다, 타이어 나사나 풀고, 더딘 일손이라도 보태겠다고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는 큰아버지가 걸리적거리기는 했어도 참았었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아버지 체면 봐서.
점점 내가 뚫어놓은 부업까지 넘보다니, 십 원짜리 장사라도 룰이라는 게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 호출이었다.
난 들어오는 큰아버지를 한번 째리고, “상규야, 가계 잘 지켜. 손님 많으면 바로 전화하고.”라고 소리를 지르며 차를 끌고 아버지 회사로 향했다.
아버지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시는 아버지 얼굴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왜? 큰아빠가 전화했지? 노인네 가게일은 거기서 끝내야지 꼭 아빠한테 이르더라.”
“그거 좀 같이 쓰면 안 되겠냐?”
“그럼 월급을 줘! 아빠도 나 때문에 대리점은 신경 안 쓰는 거잖아.”
“큰아버지 어렵다잖아.”
무슨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큰엄마는 이쁜 옷 많이 입고 며느리랑 놀러 다니더니만 이라며 소리치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집안 행사에 가면 큰엄마가 날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아빠 아들들에게 “고맙다고 우리 부모님은 못 찾아와도, 너희 아빠 나이 먹고 지방에서 고생하는데 한 번도 안 와보냐?”라고 갓 시집온 새언니 앞에서 소리를 버럭 지르자. 큰아빠는 먼 산을 바라보고 고모들이 참으라고 말렸었다. 반찬은 고사하고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보내야지.
이런 큰아빠는 날려먹는 퇴직금을 만회하기 위해 내 자리를 넘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 큰아빠한테 가게 넘겨.”라고 말하자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선을 넘었다는 건 끝난 거야. 아빠도 알잖아. 아빠가 큰아빠를 내보낼 수 있어?”
결국 큰아빠에게 가게를 넘기고 돌아온 아버지가 “형님이 네 거래처 좀 알려달라는데?”
“아빠 알아서 뚫으라 해. 해봐야 알지. 참! 내 남은 물건 대금이나 빨리 주라 해.”라는 말을 남기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차 뒷좌석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들고 산으로 들어가 한 달을 지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이나 보고, 산책하고 그간의 피로를 풀며, 공양간 나물 다듬는 걸 도와준다는 핑계로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며 유유자적한 날을 보내고 산에서 내려왔다.
통금시간이 있는 우리 집, 메인요리 2가지에 4찬 이상, 김치 2종류 이상 그리고 국이 있어야 식사하는 아버지와 주방에서 움직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어머니. 저녁은 가족이 모두 둘러앉아 먹어야 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대학생이 되어 풀어줘도 되겠건만 특별한 일 아니고선 모두 모여야 했다.
“집 떠나 있으니 좋냐?”
“아빠 얼굴 안 보고 가게 때문에 안 싸우니 좋지. 엄마도 좋지? 나랑 아빠랑 안 다투니까?”
“어디 둘이 싸웠어. 항상 큰아빠가 문제였지.”
“가게 좀 가봐.”
“싫어.”
“장부 정리가 잘못됐는지, 가게 인수하고부터 적자라네.”
“그때 다 정리했잖아. 아니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내 돈 들여 흑자를 만들어놨겠어!”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내가 장사할 땐 왜 잘됐는지 알아? 사람들이 밥 먹으러 와서 그래.”
장사하며 항상 밥 한솥 가득하고 찌개를 끓여도 한솥을 끓였다. 간식으로 전도 부치고, 난로에 고구마나 감자며 떡도 찌고 굽고, 문어발, 쥐포, 노가리도 구워주며 과일을 깎아 먹던 사무실 안은 항상 손님들로 가득 차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었다.
나도 밥은 끼니를 때우고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사람은 가슴으로 밥을 먹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