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임 Jan 30. 2024

'티타월' 너도 나에게 중요한 조리도구야

열두 개

도마를 올려놓고 칼을 들었습니다.

다음 조리기구는 뭐로 할까?

집에서 쓰는 여러 가지 도마 이야기로 시작해야 하나?

아니면 들고 있는 칼 이야기해야 하나?  

   

도마 위에 올린 요리 재료들을 썰고 칼을 물에 씻은 뒤 티타월로 닦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얘도 조리도구입니다.

그것도 구석구석에서 용이하게 쓰이는 녀석이지요.    



요리할 때 항상 어깨에 올리고 다니면서도 조리도구 이야기 주인공으로 인식하지 못했어요.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시절, 출근하면 제일 먼저 커피를 한잔 들고 조리대 위에 올려진 예약자 명단을 확인합니다.

그다음 네모난 바트에 집게, 우든 스푼, 스텐 스푼, 국자, 스파출라 같은 조리도구를 챙겨 넣고 ‘티타월’을 눈치 보이지 않을 만큼 집어 올립니다.      


이때 주의할 점은 다른 도구들과 다르게 ‘티타월’은 세탁소에서 삶고 빨아 들어오기 때문에, 섹션마다 쓸 수 있는 개수에 한정이 있어 적당량을 들고 와야 합니다. 

세탁소가 문을 닫는 주말이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지 상상이 가시나요?

직급이 높다고 해서 물을 많이 쓴다고 해서 덥석 들고 올 수 없습니다. 젖은 타월은 오븐에 걸어 말려 두고 써야 합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다가 ‘티타월’을 점령하기 위해 틈만 나면 하나 쓱 가져와 접시 뒤에 숨기고, 두 개를 들어 빈 허리춤에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 젖은 타월을 들고 일하는 녀석들에게 하나씩 몰래 나눠줍니다.     


예약이 많은 날, 특히 주말이나 달력에 빨간 숫자가 쓰여있는 날엔 1,000명 정도의 손님이 오는 불상사를 대비해 조리도구 전쟁 속에서 ‘티타월’을 몰래 피난시켜야 하는 참사가 일어납니다.

쌓아 놓은 바트 안에 숨기고, 따뜻하게 데워주는 온열기 안에 있는 접시 뒤에 숨기고, 심지어 워크인 냉장고 안에도 숨겨 놓지요.


두둥! 이때 나타나는 팀장의 파워!

설거지와 잡일을 도와주는 키친 핸드님들을 가족처럼 돌봐줬다면,

고기를 다루는 파트에 일한 덕에 구워 놓았던 스테이크나 립 같은 것을 퇴근할 시 몰래 싸줬다면,

커피나 차가운 음료를 마실 때 그들을 챙겨줬다면,

전쟁터에서 찾을 수 없었던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티타월’을 스리슬쩍 손에 쥐여주고 갑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소중했던 ‘티타월’을 조리도구 이야기에 넣을 생각을 못 했다니, 제가 생각해도 저는 개구리인가 봅니다.

    

‘티타월’이 뭐가 그리 대단한 조리도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녀석이 보조해 주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뜨거운 냄비나 프라이팬, 오븐트레이 같은 것을 들 때 어깨에 올려있는 ‘티타월’을 접어 잡습니다.    

 

집에 뜨거운 것을 집는 오븐 장갑도 있지만, 솜이 들어 두툼한 장갑은 움직임이 둔하고 이 아이들만 세탁기에 넣어 빨기엔 애매합니다. 그래서 패스.

실리콘으로 된 장갑도 있지요. 둔하기도 하지만 좀 오래 쓰다 보면 씻어줘야 하는데 뒤집어 빠는 것이 불편하고 냄새가 한번 배면 제거하기가 너무 힘들어, 찝찌름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면 새로 사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패스.

      

쌓여있는 그릇들을 그때그때 닦아 줄 수 있습니다.

일반 행주에 비해 넓고 길어 많은 양의 그릇도 가뿐합니다.   

그릇을 말릴 때 식탁에 깔아줍니다. 그리고 냄비, 프라이팬, 믹싱볼, 접시, 종지, 숟가락, 젓가락, 그날그날 쓰고 설거지한 주방살림을 널어놓지요.

  

제가 좋아하는 두부나 생으로든 데친 채소의 물기를 닦아내고 짜낼 때도 쓰지요.

‘어머, 싱크대 닦는 행주로 어떻게 먹는 음식물에 이용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일반 세탁세제가 아닌 천연 주방 세제와 과탄산소다를 넣은 스테인리스 통에 넣고 삶아냅니다. 삶아낸 ‘티타월’을 잠시 놔둔 다음 박박 비벼 빨아요.

주방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다 얼룩덜룩해진 ‘티타월’이 삶은 내가 나는 깨끗하고 하얗게 빛이 나는 아이로 다시 태어납니다.

수건보다 깨끗하겠죠.

    

이제 허브를 정리해 볼까요.

전에는 씻지 않고도 썼던 허브를 이제는 미세먼지가 많아 씻어야 쓸 수 있습니다.

허브는 물기가 묻어있으면 썰었을 때 도마와 칼에 눌어붙어 조심해 썬다 해도 쓴맛이 날 수 있지요.

물기를 먹지 않게 가볍게 흔들어 씻은 허브를 ‘티타월’로 감쌉니다. 살짝 톡톡 두드려주고 물기가 제거되길 기다립니다.     


‘티타월’로 감싼 허브를 열어 봅니다.

물기가 남아있다면 가지에 붙은 잎을 따내 다시 톡톡 물기를 제거해 줍니다.

그리고 도마 위에 올려 칼을 밀 듯이 움직이며 썰지요. 절대 허브를 탁탁탁 두드려 다지면 안 됩니다.

거짓말 보태 한 50번에서 10번 이상 칼을 밀 듯 움직여 주면 도마에 붙지 않고 가까이서 조금만 거세게 말을 해도 날아갈 수 있는 고운 허브를 볼 수 있습니다.     


허브 중 야생으로 자란 이탈리안 파슬리 같은 경우 향이나 맛이 강해 고운 파슬리 가루를 ‘티타월’에 올려 감싸지요. 그리고 물에 살 살 살 헹궈줍니다. 그리고 물기를 꼭 짜냅니다.

쟁반에 마른 ‘티타월’을 깔고 헹궈낸 고운 파슬리를 말려줍니다.    

 

돌절구 밑에 깔아 쿵쿵쿵 주방바닥이 망가지는 걸 막아주지요.

냄비 받침으로도 쓰고요.

제가 요리를 가르치는 학생들도 수업 시작 전 손을 닦고 앞치마를 맨 후 티타월 하나씩 들고 옵니다. 수업시간 필수품이죠.



재료 준비에 쓰였던 ‘티타월’은 행주로 변신해 싱크대를 말끔히 닦아주고 마지막을 장식하며 주방을 떠납니다.     


제 주방에 없어서는 안 될 ‘티타월’을 어깨에 둘러메고 오늘 저녁 온다는 만두귀신을 위해 만두전골하러 갑니다.     


오늘은 어떤 색 티타월을 꺼내 볼까?


이전 12화 대형 찜솥 없었으면 어쩔 뻔. 만두 200개' 만들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