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살롱, 쇼팽의 흔적은 깊고도 짙어라: 쇼팽박물관
# 피아노살롱(Pianosalon)
바르샤바 필하모닉 홀에서의 치열했던 전투를 뒤로 하고 퇴각¹을 선택한 우리는 쇼팽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쇼팽이 살아계신 쇼팽박물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쇼팽박물관은 필하모닉 홀에서부터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리는 1km의 거리에 있어서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가는 길 중간에 마침, 바르샤바에 오기 전에 지도에 표시를 해두었던 피아노살롱(Pianosalon)을 발견했다. 피아노 연습실을 대여할 수도 있다는 리뷰를 보고, '쇼팽 콩쿠르 기간에 바르샤바에서 연습실을 대여해서 피아노 연주를 해볼 수 있다고!? 호오...'라고 생각하며 저장해 두었었다. 5박 6일의 일정에서 겨우 하룻밤을 보낸 후 맞이한 오전이었지만, 전날 오후 도착 이후부터 아침의 티켓팅 전투까지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바르샤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 아니, 많이 (...) 사그라든 상태였다. 그런데 기대 없이 피아노살롱을 발견하니 심장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아노살롱은 이름에 걸맞게 많은 피아노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현재 피아노 업계의 탑티어 브랜드인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 갤러리와 연습실로 단장되어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스타인웨이 전시장을 볼 수 있다니..!', '바르샤바는 피아노를 애정하는 이에게 이처럼 우연을 가장하여 계획된 서프라이즈 선물을 툭- 무심하게 투척하는, 이토록 사랑스러운 도시인 건가?'라고 혼자 착각하며, 피아노살롱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창밖에서, 길 너머에서 사진을 찍고 피아노살롱에 들어서니, 직원은 피아노 레슨 중이니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안내했다. 그 후에는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쇼팽 콩쿠르 개최를 기념하며 피아노에 관심이 많은 콩쿠르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편하게 둘러보도록 배려하는 차원인 걸까 생각했다.
위엄이 넘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들이 양쪽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전공자도 아닌, 그저 피아노를 애정하는 - 애증하는 - 사람에게 스타인웨이 피아노의 행렬은, 하나의 명작과도 같았다. 안쪽에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연습실이 있는데, 대여는 불가능했다 - 콩쿠르 참가자들이 대여해서 연습중일 거라고 추측했다.
또 한 가지, 관람객들을 흥분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즐거운 여정을 함께 했던 스타들의 친필 사인이 전시장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우며 전시되어 있었다. 폴란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메르만(Krystian Zimerman)을 비롯하여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머레이 페라이어(Murray Perahia), 예브게니 키신(Evgeny Kissin), 아르카디 볼로도스(Arcadi Volodos), 랑랑(Lang Lang), 등 유수의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의 사인과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과 같은 팝스타 뮤지션의 사인도 있었다. 쇼팽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피아노 전시장에서 살아있는 전설들이 스친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상상의 영역에도 없었던 일이라 너무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한국에서 피아노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에는 시연이 가능한지에 대해 선뜻 물어보기 쉽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바르샤바 피아노살롱에서는 쇼팽 콩쿠르 기간이 아니라면 한 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 적당한 환대가 느껴졌다. 레슨을 하고 있는 연습실이 관람객들에게 노출되는 구조이기도 하고, 다른 연습실도 만실이어서 시연을 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좋아하는 쇼팽 작품 한 곡 정도는 연주해보고 싶다. 이렇게 다음 방문을 기약한다.
¹관련 글: 표 없이 왔으니 해야 할 일을 해보자.
# 쇼팽의 흔적은 깊고도 짙어라: 쇼팽박물관
피아노살롱에서의 감격스러운 순간들을 고이 접어 마음 안에 잘 담아둔 채 다시 쇼팽박물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벽화에도, 바르샤바 음악원(Uniwersytet Muzyczny Fryderyka Chopina) 벽에도, 쇼팽이 있었다. 풍경과 그 풍경을 담은 사진 그 자체가 특별한 굿즈가 되었다.
정면으로 조금 더 걸으니 바로 우리의 목적지인 쇼팽박물관(Muzeum Fryderyka Chopina w Warszawie)이 있었다. 쇼팽 인스티튜트와 쇼팽박물관 사이의 안내소에서 입장 티켓을 샀다. 드디어 우리는 쇼팽을 만난다.
겉옷과 가방을 맡기고, 쇼팽의 이름에서 출발한 쇼팽의 일대기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쇼팽도 이 세계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는데, 어리고 연약한 영혼이 창조한 세계와 쇼팽을 에워싼 시공간의 이야기가 한가득 펼쳐져 있는 곳이 바로 쇼팽박물관이었다. 쇼팽 콩쿠르 본선 무대 직관을 위해 바르샤바에 간다는 즉흥적인 계획을 세운 후부터, 쇼팽의 삶과 작품에 대해 조명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긴 비행시간 동안 페이지는 모두 넘겼으나 비몽사몽 상태로 읽어서인지 쇼팽박물관에서 보는 전시물과 쇼팽의 이야기가 익숙하면서도 때때로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쇼팽의 일대기 연표가 전시된 공간을 지나 쇼팽의 작품을 들어볼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선택한 쇼팽 작품을 관련 정보와 함께 모니터와 헤드폰으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몇 세트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듣던 쇼팽 작품을 쇼팽의 세계로 구성된 공간에서 듣는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었다. 마주르카, 에튜드, 발라드 등 몇 곡을 집중해서 들었다.
이어진 구역으로 가보니 쇼팽 작품을 연주해 주는 피아노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적인 이유로 점검 중이어서 작동하지는 않았다. 한편 어디에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고 쇼팽 작품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는데, 박물관 안에서 열리는 연주회가 시작된 것 같았다. 바르샤바에 온 것이 즉흥적인 결정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쇼팽박물관 관람일에 연주회 관람까지 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은은하게 들리는 쇼팽 작품 연주를 들으며 차분하게 관람할 수 있는, 예상치 못했던 기회를 만난 것도 신기하고 감사했다. 피아노와 함께 있는 쇼팽의 모습을 그린 멋진 작품들도 사진에 담을 수 있었고, 쇼팽의 손 주형에서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살펴보며 마음껏 감탄할 수 있었다.
쇼팽이 위대한 작품들을 창조한 흔적, 악보들도 관람할 수 있었다. 드문드문 연습하면서 손가락은 모터처럼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에튜드 Op.10 No.12(혁명) 악보도 볼 수 있었다. 밝고 튼튼한 종이 악보를 보며 연습했던 곡인데 친필 악보를 보게 되니 1800년대의 쇼팽과 2025년의 우리가 음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신비롭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젊은 쇼팽을 응원하고 지원했던 이들이 쇼팽에게 마음을 담아 주었던 물품과 쇼팽의 연주회 포스터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쇼팽박물관에는 쇼팽과 쇼팽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던, 쇼팽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의 서사가 있었다. 쇼팽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공간에 대해 더 많이 살펴본 후에 또다시 방문해보고 싶다.
쇼팽이 사용했던 필기도구들을 비롯하여 쇼팽의 물건들도 집약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중앙에 있었던 쇼팽의 플레옐 피아노가 단연 돋보였다. 쇼팽의 말년 시기, 병약해진 쇼팽도 연주할 수 있었던 가벼운 건반의 플레옐 피아노는 섬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어 쇼팽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플레옐 피아노는 아시아산의 상대적 저가 피아노 시장이 커지면서 2013년에 생산을 중단했다고 하는데, 200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의 피아노는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 피아노였는지 궁금해졌다².
신기한 장치도 있었는데, 서랍을 열면 악보의 일부가 보이고 선율이 흘러나오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맛보기처럼 짧게 재생되는 바르카롤(Barcarolle Op. 60, 뱃노래)을 인상적으로 들었는데, 너무 짧아서 감질났다. 운 좋게 직관할 수 있었던 본선 1라운드 넷째 날에 최고의 바르카롤을 연주해 주신 우리나라 참가자 피아니스트 이관욱님 덕분에 바르카롤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었다.
쇼팽박물관은 다양하고 많은 자료들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었고, 관람을 마치니 시간은 훅- 지나있었다. 관람을 마친 그때 우리는 또 하나의 행운을 얻었음을 확인했다. 쇼팽 콩쿠르 기념 특별 이벤트로 프랑스 파리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해외 출장을 온 'Romantic Life. Chopin, Scheffer, Delacroix, Sand'³ 라는 특별 전시가 있었던 것이다!
²플레옐 피아노로 연주한 영상을 검색해 보니 피아니스트 안종도님이 연주한 쇼팽 발라드 전곡 영상이 있다! 국제 쇼팽 피아노 콩쿠르처럼 5년 만에 한 번씩 개최되는 국제 쇼팽 시대악기 콩쿠르의 영상을 보면서, 시대악기로 기교와 감정을 조화롭게 구현하려면 건반을 누르는 힘을 균형 있게 유지하며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잘 단련된 근육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플레옐 피아노 같은 시대악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생겼을 때 연주해 볼 수 있도록 평소에 실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안종도님 같이 힘과 섬세함 모두를 갖춘 피아니스트가 그런 귀한 기회를 만나니 깊이 있는 아름다운 연주로 우리를 바로 그 시대로 데려다준다.
³Musée de la Vie Romantique(Paris Musées)에서 빌려온, 60점이 넘는 컬렉션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