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써야 하는 사람이다
유태계 미국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올려지는 소설을 읽었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다.
직접적 관계가 없는 애석한 일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피해자 입장이 되곤 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치 독일의 유태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악이 평범함 속에 있다는 아렌트의 말을 나는 자연스럽게 한 발 더 나아가서 인간성 자체에 대한 폄훼로까지 끌고 갔었고, 그 저변에는 피해자인 유태인 입장에서 나치 하의 평범한 독일 국민, <책 읽어주는 남자> 속 표현에 의하면 일종의 '마비'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마치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 것처럼 뚝 떨어져서 말이다.
물론 내가 그 시대의 독일 국민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자문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답은 줄곳 회피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어때야 한다'라는 것을 붙잡고 있을 때는, '나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라는 마음의 소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베른하르트는 악의 평범성을 거부했다기보다는 악이 그렇게 평범함 속에 있을 때 평범을 거부할 수 있는 특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훈계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그런 평범한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악을 목도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책임지는가, 바로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방송에서 일제 전범 재판 보상과 사과의 문제가 나올 때마다 종종 소환되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독일 청년들을 보며 독일의 전후 교육에 대해 단순하게 찬사의 마음을 갖곤 했다. 분명 아프고 수치스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을 텐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이 소설의 숨겨진 한 축은 전쟁 직후 세대의 작가가 나치에 부역했던 부모 세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다. 민족 대학살을 저지르고 방관하고 묵인한 주역들인 부모들과 그 수치의 유산을 갖고 태어난 자식들 사이의 문제, 부모이기에 마음 놓고 변호할 수도, 잔인하게 비판할 수도 없는 그 분열감.
이 책을 가해자들의 얘기로 읽었다.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과거의 부역자로서 주인공 한나 슈미트는 알고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악행을 자기 방식으로 책임지고 스러져갔다. 한나를 사랑했던 전후세대 화자 미하일에게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 여자를(혹은 그런 부모를) 사랑한 그(독일 전후 세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도 되는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옛날처럼 책 읽어주기로 그들 사이의 사랑을 보존한다. 이들 사이에 책 읽어주기는 곧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감형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윗세대가 자기 죗값을 치르면서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돕는 후대가 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작가는 판단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