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이들, 그들이 전하는 사랑
여유당 인물산책 <영원한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읽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말년까지를 서술한 책이다. 스웨덴의 소박한 농가에서 자라고, 편집 일을 하다가 미혼모가 되었으며, 주위의 시선을 견디며 다른 나라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계속한 린드그렌. 아들에 대한 마음의 짐은 평생 이어졌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읽고 새로 알게 된 것은 이것뿐이 아니다. 아동문학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고 나서 사회의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는 점, 아동의 체벌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 등은 작가에 대해, 그의 작품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빨간 머리의 삐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삐삐의 머리 모양은 '삐삐머리'로 불리지 않는가! 짝짝이 양말을 신고 커다란 구두를 신은, 주근깨 투성이의 삐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꼬마 백만장자 삐삐>, <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가 삐삐 시리즈의 제목이다. 이 이야기에는 아빠가 등장한다는 사실, 알고들 계신가 모르겠다. 삐삐는 뒤죽박죽 별장에서 혼자, 아니 원숭이 닐슨 씨와 말과 함께 산다. 엄마는 하늘에 있는 천사고(그래서 가끔 삐삐는 구름 사이로 손을 흔들며, 엄마에게 자신을 잘 지켜보고 있는지 말을 건넨다.) 아빠는 배의 선장인데, 이 아빠가 항해 중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삐삐는 아빠가 뚱뚱해서 바다에 빠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식인종 섬에 도착해서 식인종의 왕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두 번째 삐삐 이야기인 <꼬마 백만장자 삐삐>에서 삐삐의 말 대로 식인종의 왕이 된 아빠가 삐삐를 찾아온다. 딸과의 상봉은 여전히 힘이 센 지 확인하는 팔씨름으로 시작하고, 축하파티 도중 춤을 추다가는 곧 레슬링으로 이어지는데 아빠인 롱스타킹 선장은 딸의 힘을 확인하고 뿌듯해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삐삐에서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아빠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고 책의 저자 마렌 고트샬크는 서술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 속에서 엄마보다 더욱 다채롭게 그려진 아빠를 여럿 발견하게 된다."
아빠가 주는 사랑의 모습은 엄마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내 경험 또한 그렇다. 아빠와 관련해 잊을 수 없는 기억 두 가지가 있다.
6학년 때 여름 피서는 이모네 식구들과 함께였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신났고,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술도 드시면서) 기분이 났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아이들끼리 놀다가 사촌 언니와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있을 때였다. 아빠가 오셔서 우리는 둘만의 이야기를 멈추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다를 보면서 아빠는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해주셨다. 그게 바다의 다 받아줄 것 같은 넓은 품 때문이었는지, 술기운 탓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들려주신 거다.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처음으로 딸을 보러 갔는데, 누워있던 아기가 아빠를 올려다보더란다. 나와 처음 눈 마주치던 때의 이야기를, 세련되게 말씀해주시진 않았지만, 까만 눈동자의 그 눈이 너무나 맑았다는 이야기를, 아빠는 눈에 눈물을 보이며 말씀해주셨다.(그래서 내 이름의 뜻을 '구슬처럼 맑게 살아라'라는 의미로 정했다고 한다.) 난생처음으로 아빠의 눈에 눈물이 어리던 걸 본 셈이다. 옆에 한 살 위인 사촌 언니도 있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 또한 괜히 울컥해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기만 했다. 그때 하늘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던 파도 소리는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계속되는 파도소리는 바다가 얼마나 짙푸르고 또 넓은 지를 자꾸만 자꾸만 들려주는 것 같았고 내 마음도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고등학생 때 내가 스스로 뿌듯할 정도로 잘한 게 있다면(많지 않은데), 언어영역 문제집을 스스로 끝까지 다 푼 것(겨우!)과 수첩 두 권을 영어단어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꽉 채워 쓴 것 정도다. (나는 이과생이'었'다. 수학과 과학은 정말이지 싫었다.) 영어 수첩에 단어와 뜻을 옮겨 적고 몇 번 들여다보곤 했을 텐데, 어느 날 다 쓴 수첩을 다시 보는데 한 페이지 여백에 아빠의 정자 글씨가 있었다.
"내 딸, 사랑한다."
이게 전부였다. 짧은 문장이지만 겨우 이 문장 때문에 몽글몽글해져가는 이 기분을 어찌 하리. 아빠가 내가 이만큼 쓴 걸 보셨구나. 내가 수고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는구나. 아빠가 표현은 안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아빠가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저 세 단어에 나는 혼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게도 아빠가 너무 싫던 때, 아빠에게 정색하고 내 의견을 전하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분명히 사랑받았던 것이다.
아빠라는 사람은 엄마가 시간을 쏟고 정성을 들여 자식에게 들이는 수고를,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 여느 집이나 그렇다 단정할 순 없지만, 보통은 엄마가 더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은 아빠의 사랑을 분명히 느낀다는 것에 나는 경이를 느낀다.
유은실 작가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는 작가에게 반하여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헌책방에서 작가의 책을 사모으고 보물 삼던 어린이가 자라서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꼭 닮은 동화를 써냈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이 그 책이다. 제목처럼 린드그렌 선생님을 알게 되고, 그의 작품을 자기 삶에서 겪어가며 사랑을 알게 되는 맑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주인공 '비읍'이는 삐삐와는 다르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독특한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신 거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까지밖에 모르던 아빠가 학교에 가면서 배운 '비읍'으로 인해 그다음 글자, 그다음 글자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빠가 남긴 첫 번째 생일 카드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갓 태어난 너를 보았을 때 아빠는 비읍이 떠올랐단다. 비읍을 알게 된 날부터 아빠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거든. ...... 너는 아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아이란다."
비읍이 아빠만 이런 마음을 가진 건 아닌 모양이다. 바닷가에서 딸과의 첫 만남을 고백하던 아빠도 있으니. 세상의 모든 아빠에게, 아이는 모르던 세계를 알게 해 주었을 거다. 벅찬 마음으로 아빠의 역할을 해나갔을 테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그 소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뛰놀던 기억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버텨냈을 것이고, 그 버팀에 큰 힘을 준 건 분명히 사랑일 것이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어쩌면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 아이와 오랜 시간 함께 하지 못 하더라도 우리는 내 사랑을 전할 수 있다. 아이에게 사랑받은 기억을 충분히 물려주고 싶다. 또 우리 부모님께도 사랑의 기억을 돌려드려야겠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스몰토크라도 시도해봐야지.
@ <영원한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마렌 고든샬크, 여유당
@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유은실,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