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수업의 장면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계단 유리 너머로 새 두 마리가 누워있다. 최근 보수해 빛나는 회색 타일 위로 머리는 까맣고 꽁지깃은 하늘색인 새가 나란히. 유리창에 부딪힌 걸까. 등교하는 학생들이 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교무실로 올라가며 ‘누가 치우겠지.’하고 잊었다.
수업시간에 정세랑 작가의 <7교시>라는 단편소설을 소개했다. 기말고사가 끝나서 1학기 진도는 다 나갔고, 아이들은 방학만 기다린다. 소설도 읽고,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려고 준비한 수업이었다. 2098년 여섯 번째 대멸종 이후의 인류의 삶이 배경인 소설이다. 제목인 7교시는, 대멸종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태와 페미니즘이 대두되어 인류가 인구수를 줄이고 자연과 공생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현대사 수업. 환경주의 깃발에 죽은 새가 그려진 그림이 있다는 대목에서, 학생들에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표지를 보여주며, 이런 책이 있다고 책을 소개했다. ‘한 시간에 두 권이나 소개했다, 앗싸!’ 하던 어제 수업과 다르게 오늘 아침에 본 새 생각이 났다.
“얘들아, 아침에 학교 중정에 새 두 마리가”
하고 말을 꺼내자마자 학생들이 저마다 말한다.
“봤어요!”
“뭐가?”
“새가 죽었잖아.”
“정말? 어디에서?”
“왜 그런 거야?”
“창문에 부딪혔나?”
아이들이 부산하게 말하는 가운데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세로. 아이를 쳐다보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한다. 평소 졸기만 하던 아이가 웬일로 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화장실엘 가겠다고 할까 생각하며 그러라고 했다.
세로에 대해서라면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말이 없고 얌전한 아이라 수업 중 낭독을 하게 해도 목소리가 정말 작아서, 세로 차례에는 아이들이 집중을 못했다. 작은 목소리야 그렇다 쳐도 설명을 하다가 아이를 보면 고개를 꾸벅꾸벅 떨어뜨리면서 졸 때가 많았다. 작은 체구의 세로가 학교생활이 많이 피곤한가, 안쓰러운 마음에 몇 번을 깨웠는데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의아했다. 그래도 엎드려 자는 건 아니라서 혼내지도 못하겠고, 내 수업이 그렇게 지루한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다른 과목 선생님들로부터 세로가 수업 시간에 잘 존다는 얘길 듣고는 내 시간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다가도, 졸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곤 할 때면 저럴 정도면 잠이 깨지 않을까 싶어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실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어느 퇴근길이었다. 천변을 끼고 걸어오는데 내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몇 반 누구더라 하면서 걷는데 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응시하더니 오른발을 들어 그 형체를 밟으려는 거다. 점점 가까워져서 그게 뭔가 하고 봤더니, 발밑에 있는 것은 개구리, 꼼짝 않고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사체인 것 같았다. 벌써 개미가 들러붙었는데 저걸 밟으려는 건가 싶어, 세로인 걸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체도 안 하고 발걸음을 더 재게 놀려 지나쳤다. 뭐야, 동물 사체에 왜 발을 대지? 윽, 그 느낌이 상상되어 몸이 떨렸다. 저 작은 아이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길래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쌓인 게 많은 아이인가. 그 후부터 왠지 세로에게 호감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수업 시간에 두더지 이야길 했을 때에도, 늘 졸던 세로가 눈을 빛내며 질문을 하지 않았었나? 그때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주말 오후 남편과 자전거를 타면서였다. 더운 날씨에 천변길은 한산했고, 해는 뜨거웠지만 자전거가 내는 속도로 바람이 시원했다. 그런 우리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색 형체라니! 시커먼 털뭉치가 길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한 이십오 센티미터 정도 되려나? 자전거를 세우고 우리가 본 게 도대체 무엇인지 눈으로 좇으니, 그 까만 것은 어느새 풀밭으로 몸을 감추었다. 긴 에스자를 눕힌 듯한 모습의 까만 것이 풀밭을 지나는데 지나갈 때마다 풀이 움직였다. 그것은 바로,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의 주인공인 두더지였다. 남편도 나도 두더지를 처음 본다고 흥분했는데, 숨어있는 두더지에게 이 앞으로 다시 나와보라고 할 수도 없고, 움직이는 풀 동영상만 두 차례 찍고는 갈길을 갔던 것이다. 집으로 오는 내내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하다, ‘두더쥐’가 아니라 ‘두더지’다 등의 대화를 하며 그 흥분을 달랬더랬다. 그다음 날 수업시간에였나? 무슨 얘길 하다가 두더지 얘길 떠올려 이야기했더니, 그때도 이 반이었나 보다. 세로가 오늘 같은 큰 목소리로
“선생님, 두더지를 어디에서 보셨어요?”
라고 물어 왔다. 나는 그저
“응? 어디에서? 거기, 천변~.”
하면서 구체적인 장소를 대지 못했는데
“어디 옆이요? 2단지? 아님 교회 옆이요?”
하면서 집요하게 물어대서 민망했던 일이 있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던 애가 왜 이럴까 이상하기도 하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묻는 이유가, 또 동물을 발로 밟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혼자 흠칫했던 것이다.
그런 세로가 오늘 또 큰 목소리로 화장실엘 가겠다니 어디가 아픈 건가 아님 새 사체 이야기에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 든 건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소설을 다 읽어갈 무렵 세로가 교실로 돌아왔다. 소설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준비해 간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정세랑 작가의 유퀴즈 방송으로, 작가의 관심사인 새 이야기가 오늘 소설과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새를 좋아하는 작가라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겠냐고. 아이들은 환경에 대해라기보다는 그저 유재석과 조세호의 재담을 보고 웃었다. 물까치니 청호반새 이야기를 보는 학생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웃는 얼굴들 중에 세로의 얼굴이 이상했다. 입매도 어색했고, 눈썹을 찡그린 채 화면을 보고 있는 세로의 눈에 맺힌 건 눈물인가? 무슨 일인가 싶어
“세로야, 왜 그래? “
물었다.
“아까 그 새-. “
“응? 새? 무슨 새? “
“죽은 새”
무슨 말이지?
“거기 없어서……. 쓰레기 버리는 데 갔더니, 그냥 버려져 있어서…….”
“응? 아까 죽은 새 찾으러 갔어?”
“네, 그래서 제가 땅 속에 묻어주려고 새를 들었더니…….”
“어?”
“너무… 가벼웠어요.”
하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는 거다. 뭐야, 이 녀석 화장실에 간다더니 그 틈에 새를 보러 간 거였어? 땅에 묻어주려고 했다고? 손으로 그 새를 직접? 내가 아이를 단단히 오해했었나 보다. 우리 둘째가
“엄마는 지렁이가 길에 있으면 땅으로 옮겨 주잖아. “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맞다, 콘크리트나 인공 바닥 위의 지렁이를 마주칠 때 나는 발로 걔를 땅 위로 옮겨 주곤 했다. 세로가 개구리에게 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을까. 죽은 동물에게도 마음을 쓰는 세로 앞에서 나는 환경이니 동물권이니 하고 떠들어댔다니. 세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댔다. 새의 무게를 느껴본 아이로구나. 저 앞의 전자칠판에서는 아직도 물총새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에코리브르
경험을 섞어 쓴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