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여자의 포스트잇 '쓰는 고양'
'삐딱한 열심'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 특히 중학생들이 저런 특성을 지닌 것 같다. 우리 아들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이 아이의 축구 사랑은 언제부터였을까. 중2, 처음으로 학교스포츠클럽 시 대회에 출전했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전날 밤 10시 45분에 아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글 사줘."
다음 날 축구장에 오전 10시 30분까지 오라고 했다는데 그 밤에 스포츠고글 타령을 하는 것이다. 콘택트렌즈가 적응이 안 된다며, 대회에는 안경을 쓰지 못하니 고글을 사달란다. 축구 좋아하는 아들에게 진작에 콘택트렌즈를 사주었고, 자꾸 써봐야 된다고 몇 번이고 말한 터였다. 내 말을 그렇게 안 듣더니. 이날로서 렌즈를 착용한 게 겨우 두 번째일 거다.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고글 얘기에 이 밤에 어떻게 사냐, 내일 아침에도 안경점 문 안 열고, 연다 해도 도수를 넣은 고글은 그냥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명했다. 아들은
"그럼 중고로 사."
했고, 나는 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어디에서 중고 거래를 할 것이며 시력도 맞지 않을 안경을 중고로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런 실랑이를 밤 열한 시에 했다. 나는 잔다고 들어가 누웠는데 거실에서는 둘째의 축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집안에 당연히 축구공은 없다.(다 치운 지 오래다) 고양이 장난감인 털실공, 고무공 등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발로 차는 아들이다.(1층집이라 가능하다) 좀 누워있다가 거실로 나와, 그만 자라 했더니,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들 표정이 아주 의기양양이다.
"적응 다 했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렌즈를 끼고 축구 연습을 하면서 렌즈에 적응을 했다는 소리다.
"아이고, 그랬어? 그래, 잘했어. 얼른 자."
뭐라고 하겠는가. 이렇게 얘는 참 삐딱하게 열심이다.
다음 날 경기에서 아들은 긴장도 했지만 활약했고(11분의 1의 몫은 확실히 했다), 고글 이야기는 그 후에 또 이어지지만 여기까지만 쓰겠다. 아이가 자기 이름이 쓰인 유니폼을 입고 축구하는 걸 처음으로 본 셈인데, 그 뜨거운 축구장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렇게 열심히 뛰는 게 기특했다. 사실 이날뿐만이 아니다. 아침이건 오후건, 주중이건 주말이건, 여름이든 겨울이든 아이는 자꾸만 축구하러 나갔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땀 뻘뻘 흘려가며 발톱 깨져가며. 그만큼 축구에 저 아이의 열정, 애정이 있다는 거겠지.
그럼 나는, 저 아이에게 있는 그 '삐딱한 열심'이 나에게는 있나? 삐딱함도 열심도 왠지 없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해 열정을 다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요가도 아니요, 요리(절대 아니다), 쇼핑도 아닌 쓰기라고 말하고 싶다.
내 쓰기 사랑은 언제부터였을까. 영화 <비밀의 언덕>의 명은이처럼 초등학생 때부터 글짓기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대학생 때에도 쓰기에 관련한 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 전에도 썼듯이 고등학생 때 편집부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낙방했고 다른 연은 없었다. 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조금씩 뭔가를 느꼈나 보다. 첫 학교 때에는 쓰는 일보다 사진 찍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그즈음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사진 수업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동호회 활동, 출사를 다니고, 다른 분들의 사진을 보면서 나를 표현하는 일이 주는 즐거움을 알았다.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쓰고 어울리는 음악과 함께 자신을 표현하는 분에게 놀라는 나날들이 있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글쓰기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두 번째 학교에서 근무할 때에도 사진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여서 사진반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 차차 글쓰기로 방향을 전환했던 것 같다. 문학적인 글쓰기가 아닌, 치유하는 글쓰기 쪽으로. 나를 살리는 글쓰기 방과후 반을 만들기도 했고, 중3 겨울에 특별 수업으로 치유의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외롭거나 우울한 아이들이랑 글쓰기로 자신을 표현하며 자기 안의 기운을 살려내고 싶었다. 내 안에 있는 우울감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산하고 울적한 마음이나 나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 등을 달래고 싶었는데 마침 그때 읽던 책이 그런 종류였다. 실화였다는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탓일 수도 있다. 부제가 '절망을 이기는 용기를 가르쳐준 기적의 글쓰기'다.
내 '삐딱한' 열심은 쓰기를 실천하기보다는, 글쓰기 책을 사 모으는 것이었다. 나탈리 골드버그, 스티븐 킹 처럼 유명한 작가의 책은 물론이고 치유의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사서 읽었다. 책장 한 칸이 글쓰기 책의 공간이 되었고, 그 옆칸도 곧 그렇게 되었다. 나중에는 에세이스트, 소설가가 쓰는 글쓰기 책이 다 궁금했다. <글쓰는 여자의 공간>, <예술하는 습관>, <글 쓰는 딸들> 같이 왠지 멋있어 보이는 책도 탐독했다. 이렇듯 쓰기는 하지 않고 쓰기 책만 모으는 삐딱한 열심은 책을 사서 펼치지도 않은 채 고이 모셔두는 시기가 지나고, 세월(!)이 한참 흘러 큰애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에야 실질적인 쓰기로 나타났다.
'삐딱한 열심'의 열심에 해당하는 속성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내가 그나마 꾸준히 쓰려고 노력한다는 점일 테다. 일기 쓰기라든지 수첩에 메모하기 등이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다. 그렇지만 혼자 공차기를 한다고 축구 실력을 느는 건 아니듯이, 혼자 쓴다고 실력 향상이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종류의 열심을 다하여야 할 건데,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반성할 거 투성이라서다.
고수리 작가님 <쓰는 사람의 문장 필사>를 사놓고 딱 한 번만 필사했다. 수리 작가님의 글쓰기가 궁금해 사지 않고는 못 배겼는데, 막상 사서는 사철제본의 이쁜 책을 몇 번 펼쳤다가 고이 책장에 꽂아두었다. 자꾸 펼쳐서 적으라고 만들어놓은 책일 텐데. 글쓰기 모임 주수희의 언니, 희로서도 반성한다. 글에 대한 구체적인 피드백은 없이 그저 쓰자고만 하고, 친목도모만 한 것 같다. (주수희, 보고 있나? 우리 담엔 꼭 만나서 글 쓰자.) 독서모임 선생님들께도 글 쓰자고 해놓고 마음 좋은 얼굴로 겉핥기식 격려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 무엇보다도 나의 글 말이다, '꾸준히'에만 방점을 찍고 글의 질은 덜 신경 쓰나. (<-- 이렇게 써놓으면 다음번 브런치에 올릴 글에 대한 부담이 커지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고작 쓰는 습관이 생긴 것뿐이다. 당연히 더 나아지고 싶다. 그래서 '삐딱한 열심' 말고 '쓰는 고양'이라는 새로운 구절을 내 앞에 두련다. 나는 중학생이 아니니까, 저건 중학생들에게 붙여두고, '쓰는 고양'이라는 구절로 무게중심을 옮겨본다. 씀으로써 나의 정신과 기분을 북돋워 높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요, 그런 고양감을 느끼려면 일단 글을 쓰는 책상이 저기 저 <글쓰는 여자의 공간> 속 멋진 사진 같았으면 좋겠다. 나무로 된 책상이나 넓은 창 앞에서 글이 쓰고 싶다. 차분하고도 정신을 맑게 하는 공간 음향으로 쓰는 기분을 환기하고 싶다. 당연히 내 주변에는 글쓰기에 관한 책도, 너무 따라 하고 싶은 에세이도, 도전하고 싶은 소설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쓰는 내 곁에 우리 집 고양이 겨울이가 새근거렸으면 좋겠다. 그게 바로 쓰는 고양이지. 글쓰는 여자의 공간은 일단 글쓰는 여자의 포스트잇으로 대체한다. '쓰는 고양'을 써두고.
@ 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