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할게요

임포스터 : 가면을 쓴 부모가 가면을 쓴 아이를 만든다 / 리사 손

by 이진희

"알아서 할게요"

저는 살면서 이 말을 참 자주, 오래 했습니다. 흔한 대상은 부모님이었죠.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초등학생 때였으니 역사가 깊습니다. 커가며 남자 친구와 지인, 취직한 후로는 동료와 상사로 대상이 넓어졌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알아서 할게요'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비폭력대화를 연습하면서입니다. 주제를 의논하다가, '각자의 말버릇을 찾아서 자기 공감을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 바로 '알아서 할게'였습니다.

'알아서 한다'니. 얼핏 쿨하고 능력 있어 보이네요. 하지만 이 말을 했던 과거의 나는 쿨하지도 능력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엄마와 떨어지는 게 두려웠던 어린 나,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한 나, 사람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몰랐던 나,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나, 아르바이트와 진로 고민에 시달리는 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서 곤란하던 나, 제안이 거절당해서 낙심했던 나. 모두 고민과 어려움 속에 있었네요. 감당할 능력은커녕 그걸 솔직히 꺼내놓고 도움받는 방법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때 왜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드러내지 못했을까요? 리사 손 교수의 책 <임포스터 : 가면을 쓴 부모가 가면을 쓴 아이를 만든다>를 읽으며 저는 지난 시절의 저를 차분히 들여다봤습니다.



각각의 나를 떠올리면 안타깝고 안쓰럽습니다.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을 하고 나면 곁에 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나가곤 했으니까요. 알아서 하겠다는 사람을 더 붙잡기는 어렵습니다. 알아서 할수록 나는 고립되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혼자니까 알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으로 저를 내몬 셈입니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고요.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한 순간순간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도움이 필요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를 믿어 주세요
옆에 좀 있어주면 안돼요?
당신의 지지와 격려를 받고 싶어요


만약 제가 매 순간 저렇게 말했다면 관계도 상황도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격려해주거나, 적어도 곁에 있어주기라도 했을 테니 말이죠. 아니 적어도 스스로의 감정과 필요를 알아챘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습관은 쉽게 어디 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돌아본 후에도 '알아서 할게요'란 말이나 생각이 자동반응으로 떠오릅니다. 다만 입 밖에 내기 전에 되물어요. 정말 알아서 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만약 아니라면, 우선 멈춥니다. 그리고 나의 느낌과 욕구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외롭고, 버거워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봅니다. 애쓰고 있음을, 남들은 몰라도 제가 먼저 알아줍니다.


이제 저는 물어서 하고, 도와주겠다는 이가 있으면 기꺼이 받고, 알아도 한번 더 확인합니다. 알아서 하느라 낑낑대던 에너지를 제때 빠르게 해결하는 데 쓰고 있어요. 생각보다 내가 도움을 청할 곳도, 효율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혼자 알아서 할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풍요롭고 마음이 따뜻합니다.


이렇게 묻고 도움받는다고 제가 우스워지거나, 약해 보이거나, 무능력해지는 건 아니네요. 오히려 더 성장하고 배웁니다. 혼자는 결코 찾지 못했을 방법을 알게 된 적도 많고요. 묻고 도움받아하면 되니까 낯설고 새로운 일을 앞두고도 발걸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도움을 준 사람은 도리어 보람을 느끼며 고마워하기도 해요. 부탁은 어떻게 하냐에 따라 상대에게 주는 부담이 아니라 선물이기도 했습니다. 내 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준 셈이니까요. 왜 제가 남을 도울 때는 기꺼이 즐거웠으면서 남에겐 부담이고 빚이라고만 생각했을까요.


임포스터에는 '들키기 학습'이란 게 등장합니다. 우리의 본모습을 일찍 발각당할 경우 세 가지 장점을 누릴 수 있다는 건데요.

첫째 불안한 느낌이 완화된다.

둘째 학습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단계에 걸쳐 사람들의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

셋째 피드백을 통해 자기 행동을 계속 조절해나가기 때문에 '완벽한 답'이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다.


어떠세요? 너무나 큰 장점들이지요? 시간은 물론 에너지를 아끼고 정보와 돌봄이 채워지는 멋진 과정입니다. 이렇게 본모습을 들켜가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가는 과정이 바로 메타인지입니다. 다만 아무데서나 아무에게나 마구 자신을 드러내면 안 되겠지요. 안전하되 자유롭게 들키는 연습, 한번 해보려고요.


아래 문장들을 소리 내 말해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뭘 모르고 있나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몸의 반응을 살핍니다. '알아서 할게요'를 말할 때와는 어떻게 다른지. 한결 가볍고, 후련하네요.
여러분, 제가 뭘 모르고 있나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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