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로 읽어도 무방
간만에 책 한 권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책장을 넘기며 용기와 비겁, 배신과 믿음 속에서 감동과 분노 사이를 넘나들었다. 어지간한 활극 못지 않았다. 박진감에 반전까지,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읽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곳곳에서 벌어지는 논픽션이라는 것.
저자는 내 집 마련의 꿈을 품은 가장이다.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모델하우스를 구경한 후에 청약을 넣었고, 3년 뒤 입주 예정인 아파트를 분양받는데 성공한다. 아파트가 주거안정과 재테크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줄 거라 믿었지만 건설사가 워크아웃 상황에 놓이고, 광고가 허위과장임이 밝혀지면서 위기에 처한다.
난관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같은 편인줄 알았던 입주자대표회의에 속칭 '입주자 엑스(x)'가 암약하고 있었다. 1000세대에 가까운 입주예정자들 사이에서 상처주고 상처받고 또 용기를 얻는 과정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서로를 속이고 짬짜미해먹고, 대표라는 감투에만 관심있지 약자에겐 무관심하거나 소수를 이용하는 모습이 너무 익숙했다.
그는 사회 탓, 제도 탓, 기업 탓, 남 탓, 정부 탓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고 행동했다. 물론 법과 제도,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기를 요구한다. 다만 상황이 바뀌거나 남이 달라지를 무작정 기다리며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이 경험이 한 개인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같은 상황에 놓일 사람들이 덜 지치고, 덜 속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기에 여러가지 정보와 노하우도 책에 충실히 담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중심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당신은 이 중 몇 개나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 '선분양제'는 정의와 장단점
- 건설사/시행사/시공사/분양대행사의 차이
- 계약금이 10%일 경우, 입주자는 계약금만 포기하면 내가 원할 때 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까?
- 아파트 설치된 이동통신사들의 중계기 설치 임대료는 관리비에서 충당되는가?
- 재활용품 처리비용은 관리비에서 재활용 업체에 지급되는가?
- 입주자대표회의는 법적 지위를 가지는가?
- 아파트 분양과 입주 전후로 문제가 생기면 소송을 거는 것이 유리한가?
- 입주 전 사전점검 때 공유시설이나 지하시설도 체크해야하는가?
- 하자보수 소송은 입주 직후에 처리하는 것이 유리한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층간소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들린다. 가볍게는 말다툼에서, 내용증명이나 칼부림까지. 나는 궁금했다.
성질 날 정도로 소음이 심하다는 건 아파트를 잘못 지은 거 아냐? 왜 이웃들끼리 못 잡아 먹어 안달이지? 주민자치기구나 부녀회 통해서 건설사와 문제를 해결해야지.
아파트에 사는 지인들은 대답한다.
그치, 근데 여기저기 알아보다 포기했어.
아무데도 책임지는 데가 없어.
인생은 각개전투야.
나도 아파트에 살때는 잠만 자는 수준이었다. 관리비며 페인트분담금 청구서가 날아오면 '알아서 잘 하시겠거니' 꼬박꼬박냈다. 아파트는 편한 맛에 사는 게 아닌가. 별 관심 없었다.
부모님과 살 때 역시 집은 아파트였다. 독립해서 10여 년, 아파트와 원룸을 하우스푸어와 세입자로 살았다. 호기롭게 단독주택 로망을 실현해보기도 했다. 전세로 3년을 살며 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재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들 아파트 아파트해서 청약도 넣어보았지만 오히려 떨어지면 안심이 되었다. 스물 몇 평이 4억대라니. 다시 하우스푸어가 되고 싶진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여전히 빛나는 단독주택은 언감생심. 홀로 땅을 사고 집을 설계한다는 게 까마득했다.
그러던 차에 '주택협동조합'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50여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내집마련을 준비하고 있다. 건설사의 선분양위험과 베일에 쌓인 가격거품에 발목 잡히지 않으면서 주체적이고 공동체가 살아있는 주거를 하고 싶어서다.
2~3주에 한번씩 조합원들이 모여서 여러가지 문제를 결정한다. 집과 관련된 모든 가격을 공개하고 공유한다. 현장소장님도 함께 회의한다. 이웃들은 현명하고 멋지다. 선하고 능력있는 건축가님이 각 가구의 라이프 사이클에 꼭 맞게 설계도 해주셨다.
순탄치 만은 않다. 진입로가 문제다. 욕심 많은 프로 투기꾼에게 딱 걸렸다. (토지구매에서 조합과의 만남까지 너무 순조롭다 싶었다 ㅎㅎㅎ) 입주시기도 늦어지고 신경써야 할 것들도 많아지니까 지치고 낙심이 된다.
청약 넣었다 떨어진 아파트가 신축부지와 산 하나 너머에 있다. 크레인이 열심히 움직이며 집을 올린다. '아~ 빚 많이 지더라도 편하게 아파트 들어갈 걸' 투정어린 생각이 들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아파트를 분양받느냐 집을 짓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법과 대기업은 여전히 우리 편이 아니기에 우리가 패배주의에 젖거나 귀찮아하면 엑스맨들을 마주치게 된다. 과숙 바나나에 날벌레 꼬이듯 어김 없다. 하나를 해결하고나면 또 다른 미션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혼자가 아닌, 같은 지향점을 가진 이웃들과 함께라서 해볼 만 하다. 힘들겠지만 참여하고 뭉쳐서 싸워야 한다. 저자가 그랬듯이.
이 책은 부동산 재테크 노하우도, 아파트에 관한 낭만적인 예찬도, 인문사회적 비평도 아니다. 아파트 소비자로서의 외롭지만 의미있는 싸움의 기록이다. 100% 이기는 싸움은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기업이나 법과 제도, 때로는 내부의 적과 같이 막강하고 모호한 대상과 싸울 때는 더욱 그렇다.
'한번 싸워본 사람들은 눈빛부터 다르다. 그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과 주체성은 우리를 점점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다. 깨어있는 주민의 힘을 보여주고 그 경험을 나누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권리를 찾기를 희망한다. 아파트를 꿈꾸거나 지금 살고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