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임산부 맞아?

지하철에서 맞닥뜨린 상황으로 연습하는 4ears

by 이진희

'이봐 아가씨, 임산부 맞아?'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꾸벅꾸벅 졸다 깼다. 나에게 하는 말이 맞았다.


몇 주 전, 임신 사실을 확인하고 보건소에서 예의 핑크 배지를 받았다. 그렇다고 임산부 우대석을 즐겨 찾지는 않는다. 누군가 앉아있을 때가 대부분이고, 일반석이 비어있으면 그쪽이 편하다. 어색하기도 하고 나의 상태(=네, 임신했습니다)를 낯선 사람들에게 가급적 드러내고 싶지 않다. 때로 원치 않는 대화를 시도하는 분도 있다. (사례 : 몇 개월이야? 아들이야, 딸이야? 나는 애가 셋인데 우리 때는 밭 매다가 낳고 어쩌고 저쩌고...) 우대석 앞에 섰는데 양보해주지 않으면 괜히 서로 민망하다.

네, 제가 문제의 배지입니다.

그 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임산부 우대석에 주저앉았다. 새벽에 출근해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빈자리라고는 거기 하나뿐이었다.

내게 다가와 질문한 분은 아저씨라기엔 연세가 지긋하고, 어르신이라기엔 젊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산에 다녀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등산복 차림이었다. 그의 질문에 승객들의 주의가 쏠렸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사람들도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게 한 말인 걸 알면서도 되물었다.

“네?”

“임산부 맞냐고?’


앞뒤 없이 반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영락없는 이불 킥 감이다. 뒤늦게나마 비폭력대화의 ‘4Ears'라는 프로세스를 통해 스스로 다독이고,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하고 싶어 글을 쓴다.

비폭력대화에서 '기린'은 공감과 연민의 상징이다. 반대로 단절과 폭력의 상징으로 '자칼'을 사용한다. 각각의 동물이 내면과 외부로 향하는 과정을 통해 대화를 연습한다.



1단계 자칼IN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평가다. 만약 당신이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는 습관이 있다면 이 단계가 수월하다. 내 경우, 이런 자책과 자기 비난에 휩싸였다.


'배지를 달고 다닐 걸'

'힘들어도 앉지 말고 서서 갈 걸... 몇 분 편하게 가려다가 이 수모를 당했네'

'택시를 탈 걸 이게 뭐야'



2단계 자칼OUT

자칼IN과 반대로 대상에 대한 비난과 평가다.


'저 아저씨는 뭔데 나더러 임산부냐 아니냐 물어보는 거야? 재수 없으려니까 별 일이 다 있네'

'아니 여기 앉아있으면 어련히 임신했을까 봐서. 평생 속고만 살았나!'

(다른 승객들에게) '뭘 쳐다봐요!'


흔히 자칼OUT을 '사이다 발언'이라 부른다. 당사자에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 성정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참다 견디지 못해 실제로 저렇게 말한다면 잠깐은 시원해도 뒤탈이 난다. 더 큰 싸움이 나거나, 진상이 되거나, 평판이 나빠지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후회가 남는다.

안전한 관계의 사람과 자칼IN이나 OUT의 말을 나누면서 '공감'이라 착각하기 쉽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다. 단순히 나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칼은 좌절된, 하지만 중요한 욕구가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이 욕구들을 돌보아야 다음에 다르게 할 수 있다. 힘이 생긴다.


내 자칼 말이 보낸 신호는 무엇일까?

임산부 배지를 달고 다닐 걸 : 존중, 신뢰

힘들어도 앉지 말고 서서 갈 걸... 몇 분 편하게 가려다가 이 수모를 당했네 : 평화

택시를 탈 걸 이게 뭐야 : 편안함, 여유

저 아저씨는 뭔데 나더러 임산부냐 아니냐 물어보는 거야? 내가 만만해? 재수 없으려니까 별 일이 다 있네 : 존중, 배려, 안전, 예측가능성

아니 여기 앉아있으면 어련히 임신을 했을까 봐서. 평생 속고만 살았나! : 지지, 도움, 신뢰

(다른 승객들에게) 뭘 쳐다봐요! : 편안함, 연결


그렇다. 나는 내가 배지를 흔들고 다니지 않아도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음을 다른 승객들이 믿고 지지해 주길 바랬다. 존중받고 싶었다. 내가 임산부인지 궁금했다면 배려해서 물어봤다면 좋았겠다. 무엇보다 평화롭고 편안하게 집에 가고 싶었다.



3단계 기린IN

스스로를 공감하는 과정이다. 자극이 되는 말을 들은 순간의 내 느낌을 돌아보고 당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찾아본다. 머리로 생각해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오롯이 머무는 게 중요하다.


당시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어깨가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화도 나고 (졸다 깨서) 짜증도 났다. (잘못한 건 없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억울하고 무섭기도 했다.

편안함과 여유, 배려, 존중이 충족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안전'이 위협받았다. 다른 승객들에 대한 믿음과 신뢰도 깨졌다. 하나하나가 내겐 소중한 욕구다.



4단계 기린OUT

자극을 준 대상의 느낌과 욕구를 찾아서 공감하는 과정이다. 앞서 3단계를 거치며 내 욕구를 충분히 돌본 후에야 가능하다. 섣불리 했다간 정신승리가 될 수 있으니 기꺼이 하고 싶고, 할 수 있을 때 하자. 역시 상대를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느낌과 욕구에 집중해야 한다.


그 중년 남성은 순수하게 궁금했을 수 있다. 이 제도(임산부 우대석)가 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배가 아직 불룩하지 않은 저 여자가 정말 임산부인지. 제도 자체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이 민망하지 않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등산을 다녀와서) 자신도 피곤한데 특정계층만 배려받는 상황이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공정함, 명료함, 편안함, 참여의 욕구가 있었으리라 추측하고 머물러본다. 그는 그대로 화나고 짜증이 났을 것이다. 분하고 억울했을지도.

이렇게 추측해보고나니 황당함과 분노가 조금 잦아든다. 그도 납득할 수 있으면서 나도 안전하고 편안한 상황을 만들 에너지가 생긴다.



그 이후로 한동안 임산부 우대석 근처에도 안 갔다. 등산복 입은 중년 남성, 혹시 술이라도 한 잔 한 것처럼 얼굴이 벌건 분들은 얼른 피한다. 어지간히 움츠러들었나 보다.

요즘은 나에게 중요한 가치와 욕구들을 꽉 붙잡고 다르게 해 보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평화롭고 편안하게 지하철을 이용하고 싶다. 표현하지 않으면 지지받기 힘든 현실이라면 배지를 보이게 꺼내놓겠다. 이건 부끄럽거나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다. 내가 힘들 때 감사하게 배려받고,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기꺼이 돕겠다.


다시 그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말하겠다. ‘모르는 분이 갑자기 그걸 물으시니 당황되네요.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으세요?'라고, '임산부도 아닌데 여기 앉아 있는 것 같아 불편하시냐’고.



그나저나 말했던가? 당시엔 어떻게 대처했는지?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파우치에서 배지를 꺼내보였다. 긴장돼서 버벅거렸던 것 같다.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딱하고 안쓰럽다. 내가 임산부임을 증명해보인 덕분에 팽팽했던 객실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다. 중년 남성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


'그래서 애 낳으면 배지는 반납하는 거야?'


정말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아직 낳아본 적이 없어서 그건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천만다행으로 내릴 역에 도착했다. 서둘러 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플랫폼 벤치에 한참 앉아있다 계단을 올랐다. 더 단단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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