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유 하나 갖다 줘

새벽수유 후, 구체적으로 두유 달라고 부탁하기

by 이진희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어김없이 아이들이 웁니다. 울음은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는 의사표현이지만 소리가 높아지고 더구나 두 아이가 같이 울기 시작하면 무척 듣기 괴로워요.

"응~ 들었어. 배 많이 고프지? 엄마랑 아빠가 알고 있어. 지금 준비 중이란다. 3분만 기다려 줘"

입으로는 정성을 담아 울음에 대답하면서 손으로는 부지런히 분유를 탑니다.


저와 남편이 각자 한 녀석씩 먹이고 트름시키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 오지요. 아이들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잠을 청하는데 우리는 당이 딸려 눈 앞이 핑 돌아요. 이 시간에 라면을 끓여 먹기도 뭣하고. 우리가 찾은 대안은 에너지 바와 바나나 그리고 두유입니다.

오늘은 제가 먼저 다 먹였습니다. 새벽에 쪽쪽쪽. 두유를 먹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두유 하나 갖다 줘


만약 제가 수유 중에 이렇게 부탁한다면 남편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A : (말 그대로) 두유를 갖다 준다

B : 두유에 빨대를 꽂아 갖다 준다.

C : "지금 먹을 거야?" 물어보고 그렇다 하면 빨대를 꽂아 갖다 준다.

D : "지금 먹을 거야?" 물어보고 그렇다 하면 빨대를 꽂아 입에 물려준다.


A : (말 그대로) 두유를 갖다 준다

뭐 나쁠 것 없군요. 제가 한 부탁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준 것이니까요. 다만 한 손으로 젖병을 물린 상태에서 한 손을 어렵게 내어 빨대 비닐을 뜯고 빨대를 꽂아 입에 물기까지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B : 두유에 빨대를 꽂아 갖다 준다.

두유를 갖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먹기 쉽게 빨대까지 꽂아주었으니 나름 센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먹을 게 아니라면요? 옆에 두었다가 괜히 쏟아서 분유와 두유의 난장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사나 상황을 넘겨짚어서 하는 배려는 때로 안 하느니만 못하지요.


C : "지금 먹을 거야?" 물어보고 그렇다 하면 빨대를 꽂아 갖다 준다.

행동하기 전에 상대에게 먼저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떻게 도와주면 될 지를 한번 더 물었네요. 질문을 받은 사람은 별 거 아니어도 깊이 배려 받는 느낌이 듭니다. 제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테고요.


D : "지금 먹을 거야?" 물어보고 그렇다 하면 빨대를 꽂아 입에 물려준다.

제 상황을 물어보고 거기에 맞춰 최대한 배려해 주는 경우입니다. 제 경험과 생각으로는 이보다 더 사려 깊을 수 없어요.


육아를 위해 잠시 일을 내려 놓았지만, 두유를 주는 태도가 회사에서의 상황으로 옮아갑니다. 팀장이 '보고서를 써 오라'는 지시를 했다고 가정해보죠. A팀원은 말 그대로 '보고서'라고 부를 수 있는 (아마도 최소한의 퀄리티의) 문서를 가져갈 겁니다. B팀원은 자기 생각에 나름 최선인 결과물을 들고 갑니다. C팀원은 팀장에게 업무 지시를 한 배경이나 의도를 묻고 작업에 들어가겠지요. D팀원은 팀장에게 배경과 의도를 묻고 팀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더 생각해서 결과물을 만듭니다.


몇몇 선배들이 팀장이 된 후로 넌지시 말했습니다. D팀원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팀원일 때는 지시 받은 일만 생각하면 되지만 팀장이 되면 다양한 일을 빨리 파악하고 결정해야 해서 일일이 설명할 겨를이 없다고. 한 선배는 D팀원 같은 사람을 '입안의 혀'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팀장이어도 D팀원 같은 사람이 좋겠네요.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니 말입니다. 척척 알아서 내 맘에 들게 하는데 싫을 리가 없지요. 손 안대고 코 푸는 심정이 바로 이걸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알아서 잘'이란 말은 정말 애매모호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간단하지만 그걸 수행하는 사람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느라 에너지가 무척 소모됩니다.


두유를 먹는 상황으로 돌아가보지요. 상대방이 두유를 좋아하는지, 지금 먹을 건지 있다 먹을 건지, 그 새벽에 일일이 묻기도 피곤합니다. 빨대를 꽂아 먹기보다 가위로 잘라 컵에 따라먹는 걸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그걸 어떻게 다 '알아서' 하나요.

팀원도 사람인지라 팀장의 의중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한 팀장에게 속한 팀원이 한 두 명도 아니니 맡겨진 일의 배경과 의도를 말해주지 않으면 일일이 묻기 조심스럽고요.

업무가 진행 중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길 원하는지 아니면 시원하게 진행하고 결과만 듣기를 원하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팀원이 소위 말하는 ‘짬'으로 팀장의 스타일을 파악하려면 그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시간과 에너지를 눈치보는데 쓰기보다 실제 일하는데 쓰면 얼마나 좋게요.


그래서 말인데, 팀장이 D팀원처럼 접근하기는 어려울까요? 예를 들어,

이번 보고서는 한글 신명조 10에 여백은 기본값으로 10페이지, 표지는 필요 없고 그림과 표는 최소화해서 만들어 줘. 두괄식으로 결과부터 제시하고 인트로의 추진 배경이나 경쟁사 현황은 한 페이지를 넘지 않게. 본부장 님 보고 염두해서 한 페이지 요약본도 준비해 줘. 근무일 기준 3일 뒤 오전 10시에 구두로 진행상황 보고해주고 최종 데드라인은 다음주 수요일 퇴근 전까지야.

뭐 이렇게까지 말해줘야 하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를 써가면 실제 이런 점들을 수정해 오라고 합니다. A팀원이나 B팀원은 속으로 되뇌이겠지요. '아니, 똥개 훈련도 아니고... 처음부터 말을 하던가'

팀원들이 두 번 세 번 일하지 않으면 팀장도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팀장은 본부장이나 사장님이 아니고, 중간 관리자에요. 팀원으로만 일하다 지시를 하는 간부가 되었으니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해합니다. 그럴수록 더 연습해야겠지요. 업무 지시에 디테일이 담길수록 팀원들이 역량을 더 의미 있게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일일이 말하기 어려우면 표준 형식과 방향을 분기별로 공유하면 어떨까요? 팀원들도 매번 '새 문서' 열어서 창작의 고통 겪을 일 없고요.


저요? 돌아보니 팀장의 스타일, 제 컨디션과 일에 대한 의욕에 따라 A-B-C-D 사이를 마구 오고 갔습니다. 그만큼 제가 받은 평가도 들쑥날쑥했던 것 같네요. 본받을 점이 많았던 팀장님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갑니다.


이 새벽에 이런 생각을 하며 '복직하면 의사소통을 더 신경써서 해보자' 결심합니다. 비록 지금은 '얘들아, 쭉쭉 먹어 주지 않을래? 그래야 너희도 자고 엄마도 좀 자지'라며 울음 외엔 대답 없는 아가들을 상대로 간절히 부탁하고 있지만요.

그러고 보니 이런 의사소통 기술이 회사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네요. 다음에 새벽수유하다 두유가 먹고 싶으면 '두유에 빨대 꽂아서 수유의자 옆에 갖다주세요. 냉장고에 있던 거 말고 실온에 있던 미지근한 녀석으로요'라고 부탁해야겠어요.


참, 남편은 어떤 유형이냐고요? 조느라 안 먹는 아이를 상대로 땀 뻘뻘 흘리다 본인도 같이 졸고 있네요. 깨워서 빨대 꽂은 두유를 입에 물려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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