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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연 Jul 08. 2024

기뻤다가 슬펐다가

조울증 소녀가 사랑한 것들 02 | 몽연



기뻤다가 슬펐다가


  조울증이라는 단어를 많이들 사용하며 지낸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용하며 지낸다. 방금까지 화를 내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에게 "너 조울증이냐?"라는 말을 해 도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당사자가 불편해하지 않는다.

  나 역시 조울증 환자란 단순히 감정의 기복이 미친 듯이 빠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조울증일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울증은 그저 나에게 '조울증인가 봐 하고 가볍게 말하고 마는 병이었다.


  자신의 병명을 알고 병원에 방문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올해(2024), 1월과 2월에 학업적인 면에 있어 커다란 벽을 느꼈다. 나는 해도 안될 거라는 생각, 나는 똑똑하지 않다는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되면서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많이 깎이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겨울방학. 그러니까 2023년 1월에 새로운 학원에 등록했다. 수학학원이었다. 동네에 있는 작은 학원이었지만 꽤 이름을 날리던 학원이었고 특히 원장 선생님이 수업을 잘하기로 유명한 학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테스트를 봤고 틀린 문제가 많았지만 열심히 푼 모습에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신 것 같았다. 나는 원장 선생님 수업과 다른 선생님 수업, 총 두 분에게 수업을 들었다. 두 분의 온도차는 극과 극. 내 자존감을 갉아드신 분은 원장 선생님이셨다.


  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바보, 병X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셨고 공개적으로 누군가를 특정하진 않았지만 "이 문제를 틀리면 병X이다."같은 말을 달고 지내셨다. 이 외에도 수많은 욕을 들으며 수업을 들었다. 그 와중에 원장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신다는 생각에 학원을 끊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성적이 조금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큰 번아웃이 왔다. 그 당시엔 ‘열심히 했는데 왜 안되지’, ‘나는 병X인가’라는 생각만 있었지, 학원 때문에 자존감이 깎인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2주를 쉬다가 결국 학원을 끊었다.


  그렇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에서 2학년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됐다. 2학년이 중요하다, 공부량을 늘려야 한다, 학원은 어디를 다녀야 하고... 등등. 웬만한 잔소리는 다 들어본 것 같다. 그들에게 내가 얼만큼 노력하고 있는지, 얼만큼 힘들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1등급 학생이 아니니까 하는 말.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 점점 위태로워졌다. 스스로도 느꼈다. 내가 지금 당장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느낌. 나 자신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에 병원에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병원이나 약을 복용하는 걸 꺼려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지금 당장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병도 병이고 정신병 환자도 환자니까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방문 날, 올해 쏟아낼 눈물을 다 쏟아냈을 정도로 많이 울었다. 내가 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많이 울 줄은 몰랐다. 사람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말로 한 번 더 설명하면서 달리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의 질문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어디서부터 내가 망가져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망가져 있었다.


  1학년 때. 번아웃이 심하게 온 그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이후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지만 그럭저럭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울감의 원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신체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정신과에서 다루는 병들을 신체적인 변화에서 온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저 마음이 힘들고 감정이 불안한 게 아니라 신체적인 변화, 특히 뇌의 변화에서 오는 병이라고. 조울증은 단순히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 병이 아닌 우울장애에 속하는 기분장애 질환이라는 것. 심지어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정신병을 얻을 수도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숨은 증상 찾기


  내가 약을 찾는 과정에서 의사 선생님께 듣고 놀란 말이 있다. 조울증과 우울증을 구분하는 것이 꽤 힘들며 완전히 구분하고 약을 처방하기까지 심하면 5년 정도 걸리기도 한다는 것. 그 정도로 감정의 기복 기간이 긴 사람들이 있다. 우울증인 줄 알고 병원에 방문했다가 조울증 판정을 받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나는 다행히 처음 항우울제를 먹은 2주 동안 조증에 대한 증상이 심해져 기분조절제, 조울증 환자들이 먹는 약으로 처방할 수 있었던 거라고 말씀하셨다. 5년이라니 어쩌면 배신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증상이 빨리 나타난 내 몸에게 감사할 정도였다.


  처음 약을 권하셨을 때 엄마의 반응을 기억한다. 약의 부작용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나는 약이 필요했다. 엄마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진 않았지만 딸을 위한 선택을 하신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잠깐 고민하시던 엄마의 동의가 떨어지고 나서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초반에 약을 찾아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검사를 통해 병명이 확정되면 약을 받게 되는데 1주에서 2주 정도에 한 번씩 방문하여 약을 먹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관찰한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 심한 우울감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을 보고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셨다. 처음 약을 먹는 거라 극소량으로 한 알을 받았다. 취침 전에 먹는 약이었다. 약을 먹으면서 보낸 한 주는 전보다 잠이 많아졌고 충동적인 구매 욕구가 생기는 일이 잦았다.


  이러한 증상들을 담당 의사에게 말씀드렸고 조울증이 의심되니 기분 조절제로 약을 바꿔보자고 하셨다. 당시 좀 더 정확한 종합심리검사를 하는 날이 며칠 남아있었고 그동안에는 기분조절제를 처방해 주겠다는 말씀이었다. 이 약 역시 극소량으로 한 알을 받았다. 약을 바꾼 한 주는 전보다 조금 더 잠이 많아졌으며 예민해지는 게 줄어든 것 같았다.


  감정 상태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약의 용량마다 그 효과가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수면에 도움이 될 정도의 용량을 먹고 있다고 들었다. 우울증, 조울증 같은 정신 질환들은 뇌에 과부하가 온 것이며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고장 난 것이라고. 따라서 거정 먼저 잠을 잘 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약을 먹고 수면의 질이 전보다 나아진 듯했다.


  다음번에 방문했을 땐, 종합심리검사를 진행했다. 상담 선생님의 질문에 나도 몰랐던 내 감정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보고 느껴지는 걸 말한다고 생각하니 좀 더 수월하게 진실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보통 심리검사를 할 때 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투영해서 말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것들을 검사하기 위함이니까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편하게 한바탕 눈물을 쏟고 집에 가서 따로 받은 검사지까지 작성한 결과 나는 조울증이 맞았다. 증상 중에 충동적으로 구매 욕구가 샘솟는 것이 있었고 특별한 이유 없이도 기분 이 심하게 좋아지거나 예민해지는 날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약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처음 약을 먹는 나는 극소량부터 점점 약을 늘리기 시작했다. 용량이 늘면서 나타나는 증상이나 부작용들이 달라졌다. 기억력이 매우 안 좋은 탓에 모든 증상을 적어두고 병원에 방문하는 날 늘어놓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억력이 안 좋아진 것도 증상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매번 달라지는 증상들을 말하면 약을 바꿔보거나, 용량을 조절해 주신다. 약을 바꾸다 보면 나에게 맞는 약을 찾게 되고 용량을 조절하며 약을 계속 복용하다가 때가 되면 약을 줄여나가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도 모르게 숨어있는 증상들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꼼꼼히 증상을 체크해야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저 아픈 것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정신병도 그저 병이다. 내 몸이 아프다고 발악하는데 가만히 버티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한 법. 신체적, 보통은 뇌에 이상이 생기는 병인 것이다.


미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다. 내가 정신병 환자일리가 없다며 부정하는 것보다 내 아픔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병원에 방문해 필요하다면 약을 복용하는 것이 건강해지는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금도 나의 아픔을 무시하고 우울이 터지기 직전까지 짓누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울어도 되고 아파도 되고 쉬어도 되니까 꼭 병원에 가 보라고, 가서 내 이야기들을 털어놓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나면 정이 많은 조울증 소녀가 꼭 안아주러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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