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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시감 Oct 17. 2023

그럼 직접 부킹하시든지요

라운드 멤버가 얄미울 때   

‘부킹 전쟁’ 

골프 한 번 치는 데 무슨 ‘전쟁’까지 치른담… 

한국의 골퍼들은 공감하는 말이지만, 해외의 골퍼들은 백퍼센트 공감하지 못할 말이다. 

전세계에서 골프에 대한 열정이 가장 높고, 골프에 ‘진심’인 골퍼들이 넘쳐나는 한국에서 코로나19는 불 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바이러스를 피해 야외로 나온 사람들은 산으로, 골프장으로 몰려들었고 성수기 시즌 인기 있는 골프장의 황금시간대 티는 티타임이 오픈되는 즉시 광클릭을 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골프인구 대비 골프장 수가 많지 않은데, 여기에 골프인구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이름난 수도권 골프장들은 부킹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골프모임마다 그 어려운 부킹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거다. 

6년 전쯤부터인가, 고등학교 동창인 A와 나는 언니 2명과 함께 골프를 자주 치기 시작했다. A가 골프 연습장에서 만난 언니들이었는데, 나이 차이가 1살밖에 안 나 말도 잘 통하고 편했다. 지난해까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골프를 쳤는데, 부킹은 주로 나와 친구 A가 하는 편이었다.

 

언니들이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닌데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A는 사무실에서 내근하는 직종이라는 이유로, 나는 골프업계에 종사한다는 이유가 있지 않았나 추측해 봤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 우리가 그냥 ‘동생’이라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겨우 한 살 차이라도 엄연히 언니들이고 동생들인 우리가 ‘알아서 모신다’는 한국인의 장유유서 정신이라고나 할까. 여튼 어떤 모임에서든 역할분담이라는 게 있고, 나이로 서열이 어느 정도 정해지는 한국에서는 보통 동생들이 행동대장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역할은 그 모임이 끝나기 전에는 좀처럼 바뀌기도 쉽지 않다. 

여느 때처럼 부킹을 알아보던 어느 날, 

친구 A와 나는 분주히 부킹 사이트에 올라온 티를 단톡방에 공유하며 의견을 물었다. 


“언니들~ J골프장 12시 티 있는데 어떤감?”


“토요일인데 12시 티면 차 너무 막혀서 힘들어ㅠ”

B언니가 답톡을 남겼다. 


“그렇긴 한데 주말이라 오전 티가 거의 없더라고… 아님 N골프장 6시 15분은 있는데… 그걸로 할까?”

“아직 새벽에는 추워. 8시나 9시대는 없어?” 

“그럼 K골프장 7시 28분은 어때? 파주라 가깝고, 여기 거리가 짧아 우리 같은 짤순이들한테 좋잖아” 

“그린피 얼마야?” 

“28만원.”


“헐… 왜 그렇게 비싸? 여기 주말에도 22만원 정도 하지 않았어?”  

“요즘 코로나 때문에 골프장마다 그린피 난리도 아니잖아. 여기도 올해 그린피 올린 거지 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카트비 10만원에 캐디피 15만원까지 하면 40만원 들겠다!” 


'아, 비싼 건 알겠는데… 어쩌자는 거지?' 

B언니를 제외하고 모두 직장인이었던 우리는 주중에 모두 휴가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좀 비싸더라도 주말에 치기로 한 상태였다. '나는 회사에서 바쁜 시간 쪼개서 부킹을 알아보고 있는데, 집에서 편하게 있는 언니가 좀 알아보면 좋으련만...' B언니의 답톡들이 마뜩잖아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짜증을 꾹꾹 눌러 앉히고 착한 동생 코스프레를 장착하고 다시 톡을 남겼다. 


“그러게. 너무 비싸긴 하네. 그럼 그냥 N골프장으로 갈까? 전반 몇 홀은 좀 춥겠지만 9시 넘어가면서 따뜻해지지 않을까?”


“난 오케이. 그냥 하자는대로 할게.”

뒤늦게 톡방에 들어온 C언니의 응답 다음으로, 읽고 싶지 않은 B언니의 답톡이 이어졌다. 


“파주 쪽 다른 골프장들은 나온 티 없어? S골프장이나 P골프장이면 좋은데…”   


착한 척하는 것도 잠깐이라 한계치에 다다른 나는 급기야 다음과 같이 글자를 쓰다 지웠다. 

“언니, 그럼 언니가 직접 부킹을….”


그리고 친구 A에게 개인 톡을 보냈다. 단톡방에서 대화하다 개인 톡으로 보내는 내용들은 뻔하다. 불만이자 뒷다마일 가능성 99%다.   


“아니 그럼 언니가 직접 부킹을 하든지...” 

“내 말이…”

“B언니는 알아보지도 않으면서 싫다고만 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게. 언니도 좀 알아보면 안 되나... 맨날 우리가 알아보고 있는데...” 

“아 진짜, B언니 저럴 때마다 얄미워!” 


그날따라 B언니가 더 얄밉게 느껴졌던 건 지난 라운드 때 갔던 음식점도 한몫 했다. B언니는 맛집 담당이다. 이것 역시 딱히 정한 건 아니었다. B언니가 평소 먹는 걸 좋아하고, 맛집을 잘 찾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가 맛있대” “Y골프장에서 라운드 후에는 여기를 많이 간대” 하면서 블로그에서 찾은 맛집을 공유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따르는 식이다. 

골프장 근처에는 소문난 맛집이 많은 터라 실패할 확률도 높지 않았다. 다만 내가 못 먹는 메뉴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난 선지와 양 같은 내장이 들어간 해장국을 못 먹는다. 물에 빠진 고기를 싫어하는 내게 물에 빠진 내장들은 더 그로테스크한 음식이었다. 


그런데 골프장 좀 다녀본 골퍼들은 알다시피 골프장 근처에는 꼭 소문난 양평해장국집이 있다. 라운드 전 양평해장국 한 그릇이 든든한 건 알겠다. 그래도 멤버 중 한 명이 못 먹는데 굳이 양평해장국집을 매번 맛집에 올리는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그 날도 여지없이 B언니는 양평해장국집을 골라 올렸고, 친구 A는 나를 생각해 톡을 남겼다.    


“언니~ 00이 양평해장국 못 먹잖아요.” 

“아 맞다. 그럼 다른 곳 다시 찾아봐야 하나…?” 


마음속에선 ‘아니 왜 또 양평해장국?’ 다른 데 가면 안 되나…’였지만,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건 또 싫어 내 안에 숨은 배려모드를 찾아 켰다. 


“아, 언니 괜찮아요~ 다른 것도 있겠죠.” 

“그래 그럼 OO양평해장국집에서 보는 걸로 하자!”


나의 배려모드가 무색하게 B언니는 파워모드로 답했다. 사실 대부분 양평해장국 말고도 다른 메뉴가 있어 그걸 먹으면 되긴 하다. 하지만 그날따라 B언니의 득달 같은 결정에, 나는 급기야 속으로 ‘아니 양평해장국을 못 먹으면 골프를 못 치나?’ 싶으면서 심통이 났다. 


심통이 났다고 말을 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니 옹졸하다 싶었다. 


골프는 왜 네 명이 해야 하는 걸까. 둘도 셋도 아닌 넷이 하자니 골프장 정하는 것부터 부킹을 누가 하느냐, 집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누구 차로 움직일 건지, 18홀 라운드 하는 동안과 라운드가 끝난 후에는 어디 가서 뭘 먹을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 넷의 합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심사가 뒤틀리는 순간이 생길 수 있고, 그 순간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모임이 계속되느냐 파탄이냐가 결정된다. 우린 간혹 삐그덕 대도 모임이 아직 깨지진 않았다. 왜일까. 


김애란의 단편 <호텔 니약 따>는 대학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두 친구가 함께 20일 동안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변화를 담은 이야기다. 처음에는 쿵짝이 잘 맞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말하자니 쩨쩨하고, 숨기자니 옹졸해지는’ 무엇들이 쌓여가며, 두 사람은 베트남에서 합류하기로 한 또 다른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어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면 중재를 해주곤 했던 그 친구가 합류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유쾌하게 여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자기 주장이 강한 B언니와 나는 종종 의견 충돌을 빚기도 하고 때론 아슬아슬하고 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성격이 둥근 친구 A와 아량이 넓은 C언니 두 사람이 있어 제자리를 찾아온다. 두 사람이 B언니와 나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호텔 니약 따>의 두 친구는 중재자 친구를 만나지 못해 파국으로 치닫는데, 처음부터 넷이 쳐야 하는 골프 모임에서 우리는 그래도 파국은 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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