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쿠버다이빙 오픈워터 교육은 1박 2일 동안 진행된다. 이론 수업을 마치고, 제한수역(수심 5m 정도 바다), 개방수역(진짜 바다)을 경험하면 '오픈워터 자격증'을 딸 수 있다. 그 자격증을 따면 최대 수심 18m까지 다이빙할 수 있다.
내 주변에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꽤 있었다. 해외에서 스쿠버다이빙 했던 경험을 낭만 소설처럼 소개하면, '우와~'하며 깨끗한 열대 바다와 산호, 그리고 알록달록한 물고기를 연상했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지만, '먼 미래의 언젠가'였을 뿐이었다.
그랬던 내가, 40만 원이나 하는 거금을 들여 자격증 교육을 신청했다. 결제하면서도 이게 맞는지 한참 고민했다. 큰 숨 한번 들이켜고, 결제 완료.
바닷속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 출처: KBS 환경스페셜 디프다제주
비치클린 때문이었다. 해변의 쓰레기를 열심히 줍다, 물속 쓰레기도 줍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해변의 쓰레기도 물론 많았지만, 그만큼 물속 쓰레기도 많을 것이다. 물속은 과연 어떨까.
생각해보면 자격증에 도전한 건, 의무감도 아니었고, 호기심도 아니었고, 흥미도 아니었고, 명예도 아니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다. 한 가지로 콕 짚을 수가 없다.
나는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느끼지만, 투철한 의무감으로 실천하진 않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가 궁금했지만, 깊은 수심은 항상 무섭다.
새로운 레저활동인 스쿠버다이빙이 재밌어 보였지만, 몇십만 원의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물속에서 쓰레기를 줍는다면 멋있어 보이겠지만, 한 번 멋져 보이자고 서귀포까지 새벽에 운전하고 싶진 않다.
확 끌리지는 않았지만, 그냥 했다. '너무 하고 싶다'가 10, '너무 하기 싫다'가 0, '아무 생각 없'는 게 5라면, 5.5 ~ 6 정도 됐다.
한국에서 자격증 따길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교육비도 비싸고, 바다가 좋지 않아 볼 것도 없단다. 해외를 경험한 많은 사람이 다이빙은 동남아에 가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교육하는 강사님도 비슷한 얘길 했다. 한국 바다는 다이빙하기 엄청 어려운 곳이라고. 시야도 좋지 않다고. 4계절이 뚜렷하고, 해류가 좋지 않은 계절엔 다이빙을 잘 안 한다고.
그런데 함께 다이빙을 나갔던 사장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다. 그 사장님은 외국에 다이빙하러 몇백, 몇천 번을 다니셔서 마일리지가 180만 마일 정도 있으신 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손꼽히는 다이버셨다)
난 제주도가 제일 좋아
서귀포 섶섬. 특이하게 가장자리가 모두 바위다. 출처 : visitjeju
바다 같은 수족관, 수족관 같은 바다
서귀포 앞에 있는 섶섬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섬이다. 일주일 전 올레길 6번 코스를 걸을 때 그 섬 주위로 배가 정박하지 않은 채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며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바로 나였다.
섶섬은 다이빙하기 좋은 포인트가 많았고, 나의 첫 개방수역 다이빙 교육 장소로 정해졌다.
실제 바다를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기대되고 두근두근할 것 같았지만, 실상은 이퀄라이징(귓속의 압력을 바닷속과 맞추는 것)하느라 정신없었다. 귀가 터지면 어떡하나 무서워서 두근두근한 게 훨씬 컸다. 깊은 수심에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내려가도 괜찮나? 나 무서워... 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바닥에 닿아 '살았다'고 안도하니 비로소 주변 광경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수족관을 가봤을 때, 현실성 없다고 느꼈다. 고기가 왜 이렇게 많아? 알록달록 다양하게 꾸며 놓고 생물 종도 여러 종 섞어놨다. 물고기끼리 서로 잡아먹지도 않는다. 이게 진짜 바다일까? 실제 바다는, 그냥 어두운 공간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아니라면 몇 시간 동안 죽치고 앉아서 낚싯대를 던지는 사람이 저것밖에 못 잡았을 리가 없다.
음... 그러게, 왜 저것밖에 못 잡지?
치커리를 닮은 산호. 살짝 만져봤는데 치커리 맞다.
산호가 하나둘씩 나타나더니, 무채색의 바다에 색을 입혀줬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누군가가 짙은 청록 바다에 어색하게 꾸며둔 장식 같았다. 아, 이거 생긴 게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치커리랑 닮았다. 딱 보라색 치커리였다. 치커리가 이렇게 많다니! 고기에 쌈 싸 먹고 싶어졌다.
쏠배감펭
바다의 나무가 있으니, 나무 곁에 머무는 동물도 당연히 있다. 물고기가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했다.
다양한 모습의 물고기가 나왔는데, 그 모든 물고기를 '물고기'라 싸잡아 불러서 미안할 정도다. 애써 이름을 붙여주고 기억해본다.
노랑/검정 줄무늬 물고기, 짙은 붉은색을 띤 작은 물고기, 몸은 어두침침한데 엉덩이에 하얀 점을 가지고 무리 지어 다니는 엉덩이흰점물고기, 코트디부아르 국기 같은 문양을 문신처럼 새긴 코트디부아르 홍보대사 물고기. 버섯이었다면 당연히 독버섯일 색색의 물고기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물고기는 쏠배감펭이었다. 라이언피쉬라고 하길래, 외국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영어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 보이는 발음의 한국 이름이라니. 생긴 건 얼룩 고슴도치가 가시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것 같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공작새 같기도 하고, 오래되어 종이가 갈기갈기 찢어진 부채 같기도 하다. 움직임이 굉장히 느린 걸 보니,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물고기 같다. 독이 있거나.
멜떼. 옆구리가 빛나는 게 예술이다.
아래서 바라보면 검은 소행성/먼지처럼 보이는 물고기떼(왼쪽) 초장 땡기는 한치떼(오른쪽)
절벽 하나를 감고 도니, TV에서 보던 광경이 펼쳐졌다. 쓸데없는 소리부터 하면, 다이빙 마스크가 시야각이 좁아서 혹시 VR 기기를 쓴 게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진짜 다큐멘터리 같았거든.
하여튼 입 벌리고 쫓아가는 거대한 고래한테 자주 쫓길만한 물고기(나중에 알고보니 멜) 떼가 내 시야를 뒤덮었다. 마치 한적한 시골에서 보는 별 같았다. 멜 떼가 방향을 틀 때마다 옆구리로 반사하는 햇빛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누군가 반짝이를 바다에 풀어놓은 듯했다. 하... 정말... 뇌리에 박힌 그 광경을 표현할 방법이 없네.
멜 떼 영상을 다 보니, 이번엔 다양한 크기의 물고기가 다 함께 뒤엉켜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역광 때문에 물고기가 모두 검게 보이는데, 모양과 크기가 제멋대로라 우주에 있을 법한 소행성대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사실 우주선에 타고 있는 게 아닐까? 내 흥분된 숨소리와 선선한 온도의 바다 감촉이 아니었다면 분명 환시(시각적 환각)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한치 떼도 유유히 지나가는데, 영화 <트루먼 쇼>처럼, '누군가 내가 제주 바다를 사랑하게 만들려는 공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황홀하니, 내가 내뱉는 공기 방울마저 아름답게 보인다. 작고 큰 방울방울이 좌우로 흔들며 솟구치는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모습이 어른과 아이 해파리가 수면을 동경하고 떠오르는 모습 같았다. 바다에 콩깍지가 씌었나, 바다에 속해있는 내 자취까지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줄이야.
제주 바다 뽕에 잔뜩 취한 채, 다이빙을 마쳤다. 수면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한라산이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깨끗했다. 구름 모자를 쓰지 않은 한라산. 확대하면 걸어가는 사람까지 선명하게 보일 것 같다. 오늘 같은 날 한라산을 올랐으면, 분명히 백록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도 예뻤는데, 바다에서 보는 뷰까지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내 손에 카메라가 없어서 이 순간을 눈으로라도 기억하려 애썼다.
정말 완벽했다. 제주 바다는 최고였다. 내가 제주에 산다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다.
넓디넓은 다이빙 세계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보니, 다이빙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됐다. 수심 18m로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엔 부족했다. 45m까지는 들어갈 수 있는 어드밴스드 자격증은 거의 필수코스로 따야 했다.
다이빙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돈도 꽤 많이 들어간다. 다이빙 슈트의 가격은 명품 코트 가격이었다. 이젠 거의 필수인 다이빙 컴퓨터도 장만하고, 산소탱크 빼고 모든 장비를 산다고 생각하니... 다이빙은 꽤 비싼 취미에 속한다는 걸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주 바다가 좋긴 좋지만, 오늘처럼 시야가 좋은 날은 별로 없다고 한다. 해외에도 좋은 바다가 많으니 느껴보라고 많은 사람이 추천한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라도 해외여행을 가야겠다. 그럼 비행기 값도 들고, 숙박비도 들고, 휴가도 쓰고...
그보다 간과했던 게 하나 있다. 내 원래 목적이었던 바닷속 쓰레기 줍기는 보통 스쿠버다이빙이 아닌 '프리다이빙'이었다. 프리다이빙은 스쿠버다이빙과 다르게, 산소통을 매고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요구하는 기술이 다르며, 그래서 '프리다이빙 자격증'이 따로 있었다...
한 가지 취미를 깊게 한다는 게 쉽지 않구나.
바다로, 우주로.
바다.
나는 깊은 물이 무서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부유물만 떠다니는 암흑.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나올까? 갑자기 어떤 것이 나를 빨아들여 끌고 내려갈 것 같은 공포.
공포에 대면하여 스스로 내려가 봤다. 여전히 암흑은 존재했지만, 암흑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가 빛처럼 반짝였다. 보이지 않아서 무서웠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고 신비로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