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참아도 안 죽으니까 걱정마
수험생활을 막 끝낸 스무 살의 나는 '인내'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세상엔 많은 고통이 존재하고, 고통을 이겨내며 극복하는 게 성취와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했으니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러다 20대의 나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사람은 엄청 많은데, 모두가 고통을 참으면서 살아갈까? 참지 않아도 다들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그렇게 나는 고통을 멀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아프면 굳이 참지 않았고, 힘들면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구태여 참지 않아도 돼.'
숨을 헐떡대는 내게, 프리다이빙을 알려주시는 강사님은 말했다.
"숨 참으면 죽을 것 같지?"
씨익, 멋지게 기른 수염 속에 가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사람들이 숨 참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더 참지 못하는데, 사실 그건 뇌가 속이는 거야. 그 정도 참았다고 혈중 산소 농도는 거의 낮아지지 않아. 가슴이 뜨거워지고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어도 훨씬 더 참을 수 있어."
네? 전 진짜 죽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다이빙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산소통을 메고 잠수하는 스쿠버다이빙과 산소통 없이 잠수하는 프리다이빙이다. 산소통의 유무만 다를 뿐인데, 그 차이점 하나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스쿠버다이빙은 유유자적 바다를 즐기는 관광이 되고, 프리다이빙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스포츠가 되었다.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먼저 배웠다. 내 머릿속에 잠수(다이빙)는 산소통을 메는 이미지뿐이었다. 그래서 자격증을 딴다면 당연히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산소 공급 없이 바다에 들어가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숨은 얼마 참지도 못하는데, 그렇게 깊은 바다로 어떻게 들어가? 내가 인어도 아니고.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러 가서야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플로빙은 대부분 산소통 없이 프리다이빙으로 진행하고, 그래서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 아닌 프리다이빙 자격증이 필요하다. 단지 바닷속 쓰레기를 줍는 플로빙(플로카 업 + 다이빙)을 하기 위해 배운 다이빙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것이다. 자격증 비용만 40만 원이 넘는데. 내 지갑이 잘 키운 돈을 잃는 슬픔에 내가 감정이입 해버렸다.
프리다이빙을 하며 스쿠버다이빙과는 아주 다르다고 느꼈다. 단순히 호흡 방식을 떠나서 말이다. 스쿠버다이빙은 숨소리를 빼면 모두 바다의 것이다. 어스레한 수심 사이로 헤엄치는 알록달록한 물고기, 알록달록한 물고기를 품는 각기 다른 매력의 산호, 군체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움직임. 나는 바다를 느끼러 물속에 잠시 방문했다.
하지만 프리다이빙은 '나'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주연에 선다. 바다를 느끼려면 우선 나를 느껴야 한다. 파도에 뒤흔들리는 내 몸, 내가 가득 품을 수 있는 호흡, 바다의 압력에 대항하며 요동치는 심장박동, 물 밖으로 탈출하려는 욕구를 억제하는 정신력. 나를 느낀 이후에야 비로소 바다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딱 나만큼의 바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다'가 단독 주연일 땐 몰랐다, '나'라는 파트너의 존재감을. 주인공이 2명 중 한 명만 연기를 잘한다고 명작이 탄생하진 않는 것처럼, 내가 내 몫에 부합해야 다이빙이 완성된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만큼, 다시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곧 다이빙의 범위다.
강사님은 내 다이빙을, 내 바다를 넓혀주기 위해 숨을 참고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고작해야 1분 남짓 숨을 참았던 나한테 2분 30초라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주셨다. 1분만 숨을 멈춰도 답답해 미칠 것 같은데, 1분 30초 더 참으라고? '구태여 참을 필요 없다'는 내 행복론과 대치된다. 내 행복론에 따르면, 1분짜리 잠수로 바다를 충분히 즐기면 그걸로 만족하는 것인데.
하지만 지갑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기에, 한 번 해봤다. 답답한 불편함을 지나 가슴이 뜨거워지고, 숨을 쉬고 싶어하는 목 근육이 수축한다. 뒤이어 다른 근육들도 뒤틀리는 것 같다.
'끄윽... 한계인가...'
푸하, 하고 숨을 뱉으면서 급하게 공기를 빨아들인다. 갑자기 피가 도는 느낌에 머리가 띵한 것 같다. 몇 번 호흡을 끝내니 강사님이 말한다.
"지금, 금방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잖아. 숨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이야기야. 더 참을 수 있어! contraction(횡격막 수축. 숨을 참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배가 꿀렁이는 현상.)도 안 왔잖아"
한계에 도전하는 것, 그것은 한계를 찾고 자신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인 것 같다. 지금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구태여' 행복론은 힘들면 바로 그만두는 바람에, 한계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구태여' 행복론으로 힘을 빼고 살아가며 전반적으로 삶이 편안해졌지만, 반대로 한계를 인정하기 싫어서 힘을 주지 않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진짜 제대로 힘주면 다 할 수 있어!" 하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고, 곧 '구태여' 행복론을 핑계로 도전을 회피한 건 아닐까.
숨을 더 참아봤다. 정말로 참을 수 있을지 알아봤다. 강사님 말대로 더 참을 수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더 답답함에 익숙해졌다. 고통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엔 contraction을 느껴보기도 했다. 혼자 발작하듯 배가 꿀렁이는데, 느낌이 마냥 나쁘진 않았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static(물속에서 숨을 참는 프리다이빙 종목 중 하나)을 진행해보니, 어느덧 내 숨은 3분 10초까지 늘어나 있었다. 목표치인 2분 30초를 40초가량이나 넘긴 것이다. 내가 해놓고도 놀라웠고, 뿌듯했다.
숨을 더 참으며 '구태여' 행복론의 어두운 면을 마주했다. 사실 이미 어두운 면을 알고 있었지만, 인지하기 싫었다는 게 맞는 표현 같다. 내 한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나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를 과대포장하고 있었다. 내가 못 하는 게 있으면 피하기 때문에 발전이나 개선도 더디다.
'구태여' 행복론을 놓는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내게 더 자애로워졌다. 나를 이해하고 내 능력을 인정했으니, 내 기대보다 못해도 '괜찮아'졌다. 한계에 도전해서 변화가 생길 테니까, 그럼 지금과 달라지고 지금보다 나아질 테니까 '괜찮다.' 발전 가능성을 믿게 됐다. 물론 '구태여' 행복론에서도 못하면 '내가 힘 주면 될 테니까' 괜찮았지만, '못하는 나'가 괜찮지는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함께 쓰레기를 줍는 다이버를 보면, 더 높은 레벨의 자격증을 따거나 더 멋진 곳에서 다이빙하기 위해 해외를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쓰레기를 줍기 위해 프리다이빙을 배웠을 뿐이다. 조금의 욕구가 추가됐다면, 제주 곳곳의 바다를 경험하고 여러 물고기와 돌고래를 만나는 정도? 단지 그 이유였다. 그렇게 프리다이빙을 시작했지만, 예상치 못한 효과가 발생했다.
나의 바다는 산소통을 내려놓으며,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다.
나의 바다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며, '괜찮아'졌다.
나의 바다는 숨을 참으며, 더 깊고 넓어질 수 있었다.
나의 바다는 나를 품으며, 아주 조금 깨끗해질 것이다.
나의 바다는 구태여 더 아름다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