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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리 Oct 13. 2022

나는 개발 못하는 개발자

덕업일치, 하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코딩은 취미였고 독학했어요"

나는 개발자다.

하지만 대학은 생물학과를 졸업했고,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도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다. 교양수업으로 배웠던 프로그래밍이 재밌어서, 방학 때 혼자 조금 만져봤던 것이 시작이었다. 졸업 후 생물학을 포기하고 군대에서 공부한 코딩과 인공지능으로 취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월요병도 없(었)고 퇴근을 늦게 하거나 휴일에 일해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회사 가기 싫다"는 사람이 안쓰러웠지만 공감되진 않았다. 물론 소중한 취미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비유하자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배우자가 된 느낌이 아닐까? (미혼이라 적절한 비유는 아닐 수 있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내 직업에 자부심도 있었고, 부모님과 친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좋게 봐줬다. 하필 직업과 취업한 회사 모두 인기가 많을 시기였기 때문에, 예전엔 모교 초청 강연도 했다. 물론 나만 혼자 무대에서 강연한 건 아니고, 취업한 선배들 몇 명이 온라인으로 재학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하는 자리였다.


어디에서든 '독학'한 '취미'가 직업이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받기에 충분했고 꽤 멋져 보인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취미로 컴퓨터를 공부하던 시절, 할머니댁 고양이가 옆에 와서 똬리를 틀었다


개발 못하는 개발자

놀랍게도 나는 개발을 잘하지 못한다. 아예 못하진 않는다, 그럼 난 이미 잘렸겠지. 연차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공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입사했으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당연하게도 회사에서 업무 평가도 좋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잘하지 못해도 발전하려고 노력한다면 미래엔 실력이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게 많으니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점점 안되니 재미도 없어지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주말엔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출근하면 언제 퇴근할지 생각하며 걱정한다. 개발을 더 공부할 원동력이 점차 사라졌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해도 잘 안되니, 성취감을 얻어본 지 오래됐다. 일이 안 되는 게 당연해진다. 실패감에 젖어 모든 일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내가 할 수 있고 해봤던 안전한 일을 찾게 된다. 새로운 환경을 피한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 새로운 게 계속 생긴다.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아효능감이 떨어진다. 주변 동료가 잘하는 걸 보면 점점 더 내가 가라앉는다. 내가 열심히 해도 저것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회사와 동료는 참 좋다. 내 조직장도 능력 있고 배려 있다. 팀 동료는 모두 실력이 출중하다. 팀은 성과를 잘 내고 팀의 문화도 자유롭다. 얼마나 자유로우면 내가 일이 안 돼서 가만히 멍때리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치하는 건 아니다. 주기적으로 조직장과 면담하는데, 최근에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업무량이 적어요


질책하는 분위기도, 장난이었던 분위기도 아니었다. 조직장으로서 최대한 배려하면서 객관적인 피드백을 해주었다. 피드백이 너무 감사했지만, 내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내 안에 알 수 없는 출처의 밧줄이 꼬이고 꼬여 단단히 엉겨 있다. 면담이 끝나고 하루 내내 답답했다. 원래도 일이 안 됐지만, 더욱 끔찍하게 일에 손이 가지 않았다. 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싶었던 상담이 떠올랐다.

제주에 한 심리상담센터에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처음이라 망설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탈출 욕구가 나를 움직였다.

카페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이것저것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을 못하겠기에 상담 받으러 갔다

생각보다 젊은 상담자분이었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나는 걸 다 말했다. 일이 안 된다, 하기 싫다, 자아효능감이 떨어진다,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이라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이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같은 방어적인 미사여구가 미리 깔린다. 말하다 보니 회사에서 불편했던 기억이 더 떠올랐다. 열심히 코드를 짜서 동료 검토받았는데 지적받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 다른 사람의 업무 피드백이 거슬렸던 기억...

선생님은 잠잠히 듣고 계시더니, 한 마디 툭 내뱉으신다.


리더가 되고 싶어 하시네요


"네? 리더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이름을 딴 무언가를 만들고 싶진 않으세요?"


8회기 상담의 첫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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