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업일치, 하지만 슬럼프에 빠졌다
나는 개발자다.
하지만 대학은 생물학과를 졸업했고,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도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다. 교양수업으로 배웠던 프로그래밍이 재밌어서, 방학 때 혼자 조금 만져봤던 것이 시작이었다. 졸업 후 생물학을 포기하고 군대에서 공부한 코딩과 인공지능으로 취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월요병도 없(었)고 퇴근을 늦게 하거나 휴일에 일해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회사 가기 싫다"는 사람이 안쓰러웠지만 공감되진 않았다. 물론 소중한 취미 하나를 잃어버렸지만, 비유하자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배우자가 된 느낌이 아닐까? (미혼이라 적절한 비유는 아닐 수 있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나는 내 직업에 자부심도 있었고, 부모님과 친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좋게 봐줬다. 하필 직업과 취업한 회사 모두 인기가 많을 시기였기 때문에, 예전엔 모교 초청 강연도 했다. 물론 나만 혼자 무대에서 강연한 건 아니고, 취업한 선배들 몇 명이 온라인으로 재학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하는 자리였다.
어디에서든 '독학'한 '취미'가 직업이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받기에 충분했고 꽤 멋져 보인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뒷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놀랍게도 나는 개발을 잘하지 못한다. 아예 못하진 않는다, 그럼 난 이미 잘렸겠지. 연차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공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입사했으니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당연하게도 회사에서 업무 평가도 좋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잘하지 못해도 발전하려고 노력한다면 미래엔 실력이 더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게 많으니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점점 안되니 재미도 없어지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주말엔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출근하면 언제 퇴근할지 생각하며 걱정한다. 개발을 더 공부할 원동력이 점차 사라졌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해도 잘 안되니, 성취감을 얻어본 지 오래됐다. 일이 안 되는 게 당연해진다. 실패감에 젖어 모든 일의 결과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내가 할 수 있고 해봤던 안전한 일을 찾게 된다. 새로운 환경을 피한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 새로운 게 계속 생긴다. 자신감이 떨어진다, 자아효능감이 떨어진다. 주변 동료가 잘하는 걸 보면 점점 더 내가 가라앉는다. 내가 열심히 해도 저것만큼 잘할 자신이 없다.
회사와 동료는 참 좋다. 내 조직장도 능력 있고 배려 있다. 팀 동료는 모두 실력이 출중하다. 팀은 성과를 잘 내고 팀의 문화도 자유롭다. 얼마나 자유로우면 내가 일이 안 돼서 가만히 멍때리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치하는 건 아니다. 주기적으로 조직장과 면담하는데, 최근에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업무량이 적어요
질책하는 분위기도, 장난이었던 분위기도 아니었다. 조직장으로서 최대한 배려하면서 객관적인 피드백을 해주었다. 피드백이 너무 감사했지만, 내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내 안에 알 수 없는 출처의 밧줄이 꼬이고 꼬여 단단히 엉겨 있다. 면담이 끝나고 하루 내내 답답했다. 원래도 일이 안 됐지만, 더욱 끔찍하게 일에 손이 가지 않았다. 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싶었던 상담이 떠올랐다.
제주에 한 심리상담센터에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처음이라 망설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탈출 욕구가 나를 움직였다.
생각보다 젊은 상담자분이었다.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뭘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나는 걸 다 말했다. 일이 안 된다, 하기 싫다, 자아효능감이 떨어진다,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이라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이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같은 방어적인 미사여구가 미리 깔린다. 말하다 보니 회사에서 불편했던 기억이 더 떠올랐다. 열심히 코드를 짜서 동료 검토받았는데 지적받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 다른 사람의 업무 피드백이 거슬렸던 기억...
선생님은 잠잠히 듣고 계시더니, 한 마디 툭 내뱉으신다.
리더가 되고 싶어 하시네요
"네? 리더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이름을 딴 무언가를 만들고 싶진 않으세요?"
8회기 상담의 첫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