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2

(2) 로힝야족 난민사태와 팡롱조약

by 광규김

로힝야족

로힝야족의 기원은 미얀가마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레 기인한다. 1826년 버마전쟁을 통해 아라칸 지역을 얻게된 영국 총독은 이 지역으로 인도인들을 이주시켜 중간 지배계층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했다. 영국인들은 토착민의 땅을 뺴앗고 농장을 세운다. 영국인들은 이주한 인도인에게 세금만 낸다면 농장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동시에 이들에게 농장 경영을 일임한다. 이들은 이후 로잉야족이라 불리게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미얀마, 버마인들과 로힝야족과의 사이는 악화된다. 농토를 빼앗기고 피지배계층이 된 이들에게 있어 로힝야족의 존재는 원수와도 같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로힝야족에게 무기를 제공하였으나 이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는 커녕 아라칸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이에 아라칸인들은 일본에 지원요청을 하였으며, 일본 역시 이들을 무장시키자 양 민족간의 싸움이 일어나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이들이 죽게된다.


영국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미얀마가 독립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로힝야족의 처우를 보장하고 이들이 미얀마 의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미얀마인들의 반감을 사게되었으며, 네 윈 장군의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잃고 방글라데시 국경 인근의 라카인 주 북부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로힝야족은 라카인주에 거주민들에게도 반감을 사게되며, 국가적인 미움을 받게된다. 영국은 현재까지도 로힝야족의 문제를 개선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는 미얀마에 대한 내정간섭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이다.


로힝야족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탄압 받는 민족이라 불릴 만큼 어느곳에도 기댈 곳 없이 안좋은 사정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로힝야족 난민사태

2012년 5월 28일. 로힝야족 남성으로 이뤄진 3명의 강도가 라카인족의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라카인은 체포된 용의자가 타고 있다고 알려진 차량을 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10명의 로힝야족이 사망한다. 그러나 실제 용의자는 해당 버스에 탑승해있지 않았다.


2012년 6월 8일. 버스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로힝야족은 라카인 마을을 습격. 방화를 하는 등의 폭동을 일으키며 이 과정에서 12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양 민족간의 감정의 골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이어진 2012년 6월 9일. 로힝야족을 다생으로한 아라칸족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로힝야족의 거주구를 공격하여 수백여명에 이르는 로힝야족을 사살하고 이 과정에서 20만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한다.


2014년. 다에시(ISIS)에 로힝야족 분리주의 반군이 합류한다. 이들에 의해 인근 마을에 대한 공격과 태러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으로 인해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내부의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사건이 심화됨에 따라 미얀마 정부는 경찰 병력을 라카인주에 투입. 상시 감시체제에 들어간다.


2016년 10월 9일. 로힝야 무장 반군에 의해 버마 국경 초소가 습격당하고 이 과정에서 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탄약과 무기가 탈취당했으며 이어진 10월 11일. 다시 4명의 버마인이 살해당한다.


버마정부는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섰다.


2017년 8월 26일. ISIS의 지원을 받아 중화기로 무장한 로힝야 반군이 경찰 초소 수십곳을 습격. 수백명의 사상사가 발생한다. 이에 미얀마군은 로힝야 구원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 로힝야족의 거주구를 군사작전구역으로 선포하며 군대를 움직여 반군과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반군이 아닌 로힝야족 일반인들 역시 거주지가 파괴당하고 추방당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로 인하여 약 60만명에 이르는 로힝야족 난민이 발생하며 대부분의 로힝야족은 집을 잃고 방글라데시로 넘어간다.


그러나 미얀마 반군을 동정할수는 없다. 이들은 다에시에 충성하였고,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승려, 힌두교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행위로 군사적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역시 대량으로 발생한 로힝야족 난민을 반기지 않는 상황이다. 이들은 로힝야족 난민이 대규모로 모여 민족 집단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난민을 향해 기관총을 발포한 방글라데시군의 만행 역시 목격된바가 있다.


미얀마 문민정부의 실세였던 아웅상 수 치는 2017년 9월 19일경 40만명이 넘는 로힝야족 난민이 발생한 사태를 조속히 해결할 것과 국제 사회의 도움을 요청한바가 있다. 그러나 아웅산 수 치와 그녀가 이끌던 미얀마 정부는 직접적인 해결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지 않았다. 이들 전부의 주축은 로힝야족과의 감정의 골이 깊은 버마 족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 밖에 여러 정치적 이유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서거나 이에 대한 해결 의지초차 가지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2021년 현재. 로힝야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문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팡롱 조약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웅 산 수치의 부친 아웅 산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였다. 이들은 1942년부터 2년간 일본의 편에서 영국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군사활동을 펼쳤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며 2차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아웅 산은 영국으로 가서 영국령이된 버마의 독립을 요구한다.


1947년 2월 12일. 아웅 산을 비롯한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영국과 팡롱 조약을 맺으며 버마는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된다. 1886년부터 이어진 긴 식민지 시대가 마침내 끝이 난다. 그러나 현 미얀마정부와 미얀마 군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있다. 미얀마 정부는 버마 연방이 성립된 1948 건021.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국의 해로 여기고 있다.


팡롱조약은 미얀 소수민족의 자치 및 독립의 여부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직후 아웅 산이 암살당하며 1962년 3월 2일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고 버마민주 공화국이 붕괴된다. 군부에 의해 정권이 장악당하였고, 소수 민족의 독립과 자치에 대한 요구는 철저하게 묵살당한다. 로힝야족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아라칸지역으로 강재 이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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