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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도래

by 광규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4


[좋은 소식]

복음. 기독교의 시작과 끝이 되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의미로 말해지던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유앙겔리온. 복음이라는 이 말은 사실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을 찬양하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로마는 세계 최고의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배가 대륙. 아니 세상에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평화는 팍스 로마나. 곧 제국의 힘과 권력에 의한 평화였습니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전쟁 이후 평화를 가져온 신의 아들, 구세주, 주라 불렀으며 그의 출생이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은 분봉왕 헤롯이 세워졌고 그는 허수아비 왕으로서 황제를 찬양하며 권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방의 학자들이 왕을 찾아옵니다.


“우리는 탄생하신 유대의 왕을 만나뵈러 왔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로마에 아첨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헤롯은 그 말을 듣고 불안했습니다. 헤롯 가문이 이어가야할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는 초라했습니다. 집도 없는 난민의 신세로 짐승의 구유에 누운 아기는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날에 목자들은 하늘에서 찬양하는 천사들을 만났고 별을 따라간 박사들은 진정한 왕을 보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임하시니”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유대 율법의 종말의 계시에 나오는 아기의 이름이었습니다.


[왕을 기다리다]

그들은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어찌되었건 간에 자신들의 억눌린 상황을 바꿔줄 평화의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통치보다 강력한 것이어야했으며, 사제와 귀족의 다스림 보다 공평하고 아름다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초라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제대로 누워 쉴수도 없는 난민의 모습으로 이땅에 왔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천사들은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로다. 정말로 그 무엇도 별볼일 없이 이방인과 목자의 축하를 받는 왕의 탄생이야말로 땅의 평화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오늘날 저희의 신앙적 이상향을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예수는 로마의 제국주의적 통치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의미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나라의 다스림. 그가 말하는 복음이라는 질서와 원리는 폭력으로 점철되어있던 제국의 평화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수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원수를 죽여 없애 평화를 만들었던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는 다른 또다른 영역의 윤리적 숙고와 실천을 메시아는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때로는 기대와 상상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화려할 것만 같던 나의 인생이 이토록 초라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때로는 우리가 상상해온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극이 낮은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자기에게 한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던 곳은 늘 병자와 가난한자가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기댈 곳 없는 이들의 안식처 그리고 이름 없는 이들의 영광이 되신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서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우리의 희망과 소망도 그리고 곧 승리할 것만 같던 하나님의 일하심도 생각해온 것들 그리고 기대해온 것들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성경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오신다]

곧 왕이 오십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계는 축제의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혹독히 춥고 외로운 계절이 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복이 없다 말하는 낮은 이들 가운데 기쁨이 되어주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왕의 주변으로 몰려든 이들은 존귀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아보이는 이들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장애가 있었고, 누군가는 멸시받는 직업을 가졌고, 누군가는 가난했으며, 누군가는 오랜 병에 고통을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성탄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고 그 독생자의 탄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그렇게 그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머리둘 곳도 없는 집도 없는 난민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으며 돌아와서는 목수의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당시는 헤롯 안티파스 왕의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많았고 그런 농민들은 수공업자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의 아버지 요셉도 이런 착취의 피해자들 중 하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마는 평화를 말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힘에 의한 억눌린 평화였으며, 너무나 쉽게 사람이 죽고 너무나 쉽게 폭력이 일어나는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살아갔습니다. 유대에는 반 로마적인 풍조가 팽배했으며 언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사후 유대는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예루살렘과 성전히 초토화되며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제국의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나라였습니다. 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식민지가 필요했고 그것은 나라간의 힘의 차이에 의해서 생겨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복음은 그런 세상을 만든 황제를 찬양하는 말로써 복된 소식을 사용했습니다. 일시적인 평화, 불완전한 평화. 그것이 그들의 평강이었습니다.


[평강의 왕]

그러나 평강의 왕 예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철저히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의 폭력적인 모습들을 어루만집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먹였고, 아픈자들을 치료했으며, 무지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세가지 일이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는 단어들입니다.


성경은 예수의 탄생을 복음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황제의 다스림과 대치되는 왕의 다스림이었고, 제국에 의한 평화와 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었고, 그의 무리는 초라한 행색으로 사람들 사이를 다녔습니다.


마침내 예수가 잡혀 죽을 때 그의 죄명을 적는 명패에는 이런 문장이 적힙니다. “유대인의 왕”. 세상 사람 모두에게는 이것이 황제에 패한 자칭 왕의 처참한 말로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짓밟혔고 찢겨나갔고 못박혔습니다. 그의 모습 어디에도 영광이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정된 말로를 가진 왕을 보고서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는 자들에게 평화로다.”


[경배]

자 이제 당신은 그를 왕으로 맞이해야합니다.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당신이 생각하고 상상해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당신은 그를 평강의 왕이라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왕의 탄생을 축하해합니다.


낮은자의 기쁨으로 오신 초라한 행색의 아기를 메시아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예수를 긍정하는건 그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삶을 긍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경배하는건 그 초라한 행색의 나귀를 타신 왕을 경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광을 돌리십시오. 머리둘 곳 없는 당신의 왕께. 그의 이름은 예수 곧 구원이며,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입니다. 곧 임마누엘 예수란 이름은 그 하나님의 동행이 우리에게 구원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비참하게 죽어간 그왕을 황제의 탄생에 의한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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