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이 잡지를 팔고 계셨다.
나는 자리를 옮겼다. 수중에 돈이 없었다.
노숙인이 소리를 지르신다. 사세요라는 소리 같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그런 소리 지름이다. 이를 구경하던 어르신이 소리를 지른다. 나는 점점 더 불편해진다. 내게는 마치 조롱처럼 느껴지는 도시의 소음들이 아저씨의 목소리를 지워간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다. 도처에 소리가 가득하다. 캐럴 소리,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 빵빵 거리는 자동차 소리와 언제나 분주한 배달 오토바이의 소리가 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들 너머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소외된 자들의 소리.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얼마 전에는 장애인들의 시위가 있었다. 지하철 운행에 차질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목소리가 나왔다. "그들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그동안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이들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선사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만을 생각했다. 그전까지 그들을 위해 싸운 적 한번 없으면서 외로운 싸움터에 나온 이들을 나무랐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누가 옳은 것일까? 나는 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이제 막 인수인계 과정을 마친 풋내기 전도사일 뿐이었다. 정장을 입고서 지하철에 오른다. 오늘도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있을 공간을 지나 나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출근을 한다. 아니. 신의 목소리였던가? 아무런들 어떠랴. 어쨌거나 나는 선포를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출퇴근 시간을 합치면 세 시간이 훌쩍 넘는 먼 거리를 단지 만날 수도 없는 아이들을 섬기기 위해 이동한다. 사람들은 이런 합리적이지 않은 직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하지만 사람들의 인정은 옛날에 등진 지 오래이다. 나를 기억해주실 분은 오직 한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이름 없이 사람들을 섬긴다.
봉사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멋지다고 말한다. 자신들은 차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며 시간과 재산을 할애하는 우리의 모습은 비합리적이다. 실은 멋있지 않다. 자본주의를 역행하는 자선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백이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돈을 위해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돈이란 것을 거스르는 사랑이란 개념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자그마한 선포였다. 그것이 우리의 목소리가 되었고 우리의 정체성이 되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도시의 소음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리의 소리도 그렇게 없어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목소리를 전한다. 오래전 우리에게 찾아와 한 나라를 전했던 왕의 이름을 전한다. 그는 평강의 왕. 그리고 사랑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