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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규김 Aug 20. 2022

아이들에겐 체념이 아닌 포기를

너무 일찍 철이든 아이를 보면 눈물이 맺히곤 했다.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른스러워져야 했던 아이의 환경이 떠올라서인지, 체념을 먼저 배워야 했던 내가 곂쳐보여서 인지. 더러는 아이 같지 않은 아이를 보면 무섭다고 하지만 그 감정은 짧은 단어 하나로 규정하기에는 너무 깊은 것이어서 우선 안쓰럽고 아픈 것이라 말한다. 세상을 물려주고 남겨준다기에는 한 사람은 너무 작지만 아이의 인생도 겨우 한 사람 몫일뿐이라서 내가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 날 복도로 나를 불러내 짧은 면담을 해주셨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쩌면 규광이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걸 지도 모르겠다."


유독 말을 듣지 않고 반항적인 아이들이 많았던 우리 학년은 학교에서도 손을 놓다시피 했던 골칫덩이들이었다. 그래 봤자 중학교 3학년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들이었지만 책임의 무게도 없이 영악하게 구는 것만 먼저 깨우쳐버린 문제아들이 포진해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별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성실하거나 성적이 좋지도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눈에 띄지도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을 스쳐 지나갈 인연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선생님이 학급에 들고 오신 자기소개서에 눈독을 들였다. 아는 것은 쥐뿔도 없고, 실행력도 책임감도 짧았던 아이에겐 돌아보면 순수하면서도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신념이었고 가치관이었다. 세월을 살며 굳은살로 뒤덮여 딱딱하고 무감각해진 어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끌어당기는 어떤 성숙한 것이 있었다. 성숙하면서도 더 성숙해지면서는 반드시 잃어버리게 될 아름다운 무언가였다. 


그때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가장 깊은 곳의 바람을 감추기 위한 도피였지만 사람들은 내 진로와 적성이 그곳에 있는 줄 알았다. 큰 거짓말은 이미 스스로 믿어버릴 만큼 진심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아했던 나는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작성했다. 선생님은 그것을 토대로 아이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상담을 하려 하셨었다. 하지만 장황하게 꿈을 적었던 내 글의 결말은 마이스터 고등학교 즉 이른 취업을 위한 진학이었이었다. 


그때 복도 창가에 기대서 선생님과 나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은 내가 더 배우고 내 적성에 맞는 일을 해나가길 권하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예고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일반고를 가더라도 예체능으로 갈법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자아실현에 대한 마음은 잠시 접고 현실적인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했다. 이 결정을 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훨씬 오래전부터 나는 기대를 하면 안 되는 사람이란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동생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다. 성공하지 못해도 그저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일은 그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 벽이 되었다.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았지만 나는 조용히 체념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체념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내려놓음 곧 포기를 가르쳐야한다. 


나는 꿈을 꾸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법을 배우기에 앞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법을 먼저 배워야만 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넘도록 돌아볼 수 없는 한편으로 치워버리고 잊은 듯 살아가야 했다. 아마도 그때였다. 처음으로 어른이 철이든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모습을 봤다. 그 순간만큼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나를 따라다녔다. 더 많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느 순간 나 역시 그런 표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아이일 적을 추억한다. 어린 나는 어서 철이 들면 좋은 줄 알았지만 그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음을 놓치고 살았다.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내 과거가 비춰보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기분이 나빴다. 그때는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그것이 불쾌함은 아니었음을 시간이 오래 지나서 깨달았다. 몹시 아파서 차마 마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체념하고 도망친 것처럼 다시 한번 가장 비참했던 그때를 대면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눈이 내가 아닌 창밖의 머나먼 하늘을 그저 바라만 봐야 했던 이유를 깨달았던 것이다. 씁쓸하고 먹먹한 감정이었다. 깊은 곳에 가라앉고 사방에서 무거운 것이 짓누르지만 떨쳐내지 못하고 실컷 울어야만 상쾌하게 가시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후련해지도록 흐느끼기엔 너무 늦어버린 어른의 현실은 답답한 것이었다. 


결핍 없이 자라난 아이가 그 안에 철보다는 넘치는 사랑이 들어앉아서 성숙해진다면 나 같은 건 흉내도 낼 수 없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갖게 된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나는 철든 어른보다 흠 없이 빚어진 따뜻한 마음이 이 아픔 많은 세상에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흠 없는 어린양 이었다. 나같이 들판에서 살아남은 억센 짐승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해맑은 사랑보다 그윽한 긍휼로 사람을 품기로 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은 될 수 없었지만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마음이란 걸 살아온 모든 삶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이 근심 없이 꿈을 꾸며 티 없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나는 여전히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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