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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설화가 조명한 현재

by 광규김 Feb 25. 2025

<창세기>나 <에누마엘리시> 같은 고대 근동의 창조는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고대근동의 창조는 혼돈을 제압한 질서를 의미한다고대근동의 창조는 혼돈을 제압한 질서를 의미한다

창조는 과거에 천착하여 현재를 왜곡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 이후의 현실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창조는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느냐 가 아니라 ‘왜’ 생겨났느냐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창조는 실재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은 왜 유한한가?’가 <에누마 엘리시>의 질문이었고, 같은 고대근동을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창조는 ‘창조 이후, 타락 이후, 추방 이후, 형제의 불화 이후’를 말하고 있다. 현재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 세상이 왜 이지경이 되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경건한 조상들의 족보를 넘어 자신이 사는 세계로 이르렀을 때에 현재에 대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금에 대한 ‘왜?’를 던져 인간의 유한성 곧 죽음과 고통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그 한계 너머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다. 이 만남으로부터 자신이 비롯되고, 현존재(Da-Sein)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만남이 만든 울림 곧 심장이 떨리는 누미노제(Numinöse)를 통해 현존재는 비롯된 존재를 뛰어넘어 나아가는 존재가 된다.


성경 속 ‘문학’이 인간을 향해 던진 ‘상황’은 그가 신봉하던 정신적 가치 곧 도그마에 맞설 칼을 쥐어준다. 우리는 상황을 통해 문자화된 정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교리의 허점을 발견한다. 


현재를 사랑하는가? 현재에 매몰되었는가?현재를 사랑하는가? 현재에 매몰되었는가?

그때에 우리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만끽함’‘아모르 파티(Amor-fati)-자기 운명을 사랑함’을  초월한다. 한계 너머에서 찾아온 하나님을 통해 운명과 현재를 즐기는 존재를 넘어선다. 운명과 현재가 향할 종말을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는 내게 다가온 마지막을 통해 현재를 결정한다. 결정이라 하니 표현이 애매하다 싶지만, 종말은 결정이기 때문에 이미 완성된 나의 결말을 통해 한계로 점철된 현재를 뛰어넘는다. 실존이 본질화 되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연과학과 창세기 1장의 차이점을 두고서 과학적 발견에 싸우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세기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깨닫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짓는 자세한 과정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지어진 인간이란 존재를 향해 명령을 주셨다.


인간은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져서, 세상에 대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창조세상에 대해 인간은 ‘경작’하는 존재고, 다른 인간에 대해서는 ‘돕는 배필’이 되는 존재다.


이 경작과 돕는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그리고 인간을 향해 하셨던 일이고, 하나님은 이제 그 역할을 인간에게 맡기시며 자신과 함께 일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창조는 인간의 구성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바를 말한다.  창조라는 시점에 갇혀서, 글자 안에 갇혀서 현실을 왜면하고 또 왜곡하는 어리석은 괴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문자와 도그마를 넘어 말씀의 지혜를 배움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감이 말씀 곧 로고스가 우리에게 바라는 일이다.


창조는 되돌아감이 아니라 나아감을 위한 글이다. 창조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글이다. 창조가 그리는 것은 세상의 탄생이 아닌 세상의 현재에 대한 이해다. 


그러므로 창조는 본질을 통해 실재를 비춘다. 창조가 실재가 되는 삶은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이 잃지 말아야할 목적지를 끊임 없이 환기시키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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