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중일기- 건배를 잃었다

술을 잃는 것은 건배를 잃는 것

by 기역
「두목, 이렇게 말한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만 마쇼.
당신 대가리는 아무리 봐도 아직 여문 것 같지 않소. 올해 몇이시오?」

「서른다섯이오.」

「그럼 앞으로도 여물긴 텄군.」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가 말했듯 여전히 여물지 못한 나이,

하지만 적지만은 않은 나이.

30대 중반을 통과중인 사람.

결혼도 육아도 지금은 남의 일인 여자 사람.


얼굴엔 주름이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들고

여성질환이 위아래로(?) 쥐도 새도 모르게 습격해오기 시작하는 나이다.

이젠 가슴도 위험하고 자궁과 난소도 본격적으로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암이란 게 이제 정말 남의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직은 선방하고 있다. 비염 외에 아직은 어딘가가 안좋은 상태는 아니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체력은 더 안좋아지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나이가 든다는 건 자고 일어나도 풀충전이 되지 않는 것.

자고나서 100%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70%,80%에서 시작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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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금주를 하기로 한 건 아니지만 웬만하면 술을 피하고 있다.

내게 있어서 술은 에너지 뱀파이어였다.

술은 나에게서 많은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야구를 한창 열심히 보던 시절에는 직관을 가면 맥주 한잔,

집관을 하면서도 맥주 한잔을 꼭 했었다.

한때는 퇴근 후 기분이 좋지 않은 날(거의 항상 기분이 안 좋음)엔 사람들과 술을 함께 마시곤 했었다.

취한 상태가 주는 근원 모를 용기, 밝음, 텐션을 즐겼었지만,

마시고 나서 몸이 가벼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폭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 숙취가 감당이 안됐었다.

잠깐 기분이 좋아지는 것 치고 치러야 할 대가들이 많았다.

위장장애, 어지러움, 두통, 이것들을 동반한 지옥의 출근길 등...


갑자기 주말에 티비를 보다가 사람들이 건배를 하는 장면을 봤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건배'를 잃었다는 것을.

술을 잃는 것은 건배를 잃는 것이었구나.


많은 건배사를 듣고 건배를 했지만 한번도 의미를 둬본 적이 없었는데,

건배란 건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건배를 잃고서 알았다.



오늘도 고생 정말 많았어요.
우리 함께 이시간을 즐겁게 보내요.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당신을 응원해요.



한번이라도 내가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져봤더라면 좋았을텐데.

내 삶이 힘든 만큼이나 다른 사람도 어쩌면 오늘을 힘겹게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런 도량이 내게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일찍부터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텐데.

내 마음만 들볶이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술과 함께한 십수년간의 시간동안 아쉽게도 내겐

기억에 남는 건배의 순간이 한 순간도 남아있지 않다.

건배라는 게 그냥 잔을 부딪치는 의례적인 단순한 행위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어떤 해석을 붙이느냐에 따라 따뜻한 순간, 기억에 남는 순간이 될 수도 있었던 거다.


이제는 기분이 안 좋을 땐 술을 마시지 않는다.

정말 기분이 좋을 때에만 가끔 술을 마신다.

앞으로 술을 함께 먹을 자리가 생기면,

함께인 사람들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진심을 담은 건배를 해보고 싶다.



그린이-기역/글쓴이-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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