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옛날 사람이 된 나의 시간들엔 덕후의 역사가 수 놓였다
아- 옛날이여
지난 시절 다시 올 수 없나, 그날
아니야, 이제는 잊어야지
아름다운 사연들
구름 속에 묻으리
이선희 '아, 옛날이여' 중
고백하자면 난 덕질 영재였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싶고, 관련된 콘텐츠를 더 많이 모으고 싶은 마음.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걸 8살 때 처음 경험했다.
김건모의 노래를 듣고 조성모의 뮤직비디오를 봤던 기억,
HOT의 사진과 착용 아이템을 사러 다녔던 기억,
이정현의 '와'를 보고 팬이 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입학했을 때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아이돌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HOT, 젝스키스, god, 신화, 핑클, SES가 나왔고
중학교 때는 동방신기, 고등학교 때는 빅뱅, 소녀시대, 원더걸스가 나왔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k-pop은 거대 산업이 되었고
k-pop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게 바뀌고 발전했다.
어떤 것들은 사라졌고 어떤 것들은 태어나길 반복했다.
공중전화부터 스카이, 애니콜을 거쳐 지금의 나는 접히는 핸드폰을 쓰게 됐다.
이젠 게임을 하지 않지만 문방구 앞 게임기부터 다마고치, 닌텐도, 플레이스테이션을 좋아했다.
한국의 격변기여서 그랬는지 뭔가가 정점을 찍거나 가파르게 상승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IMF 금 모으기 운동에 엄마랑 같이 은행을 갔던 일, 2002년 월드컵 때 나라가 들썩 거려던 일 등
주로 굵직굵직한 일들 위주로 기억이 난다.
그런 걸 아는 내가 역사의 산 증인 같고 옛날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많은 기억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훨씬 오래 사신 분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게도 이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을 할 때나 모임을 가질 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을 보면 나는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몇 년 전만 해도 2000년대생과 대화를 하는 게 신기했지만
2000년대생도 20대 중반이라는 것에 이제는 적응 중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내 나이와의 갭에 흠칫 놀라면서 내가 나이가 굉장히 많게 느껴진다.
물론 적지 않은 나이지만 내가 벌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대의 시간이 힘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나는 타인의 20대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럽다거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진 않는다.
사실 나는 20대 중반에 깊은 우울증과 강박증으로 고생했다.
그때의 난 30대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지나온 시간들이 언제 이렇게 지나갔지? 싶을 때는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인생의 매 시절마다 손에 바로 닿지 않는 뭔가를 동경하고 사랑했다.
10대엔 아이돌을, 20대엔 프로야구팀, 30대 초반엔 국민이 뽑은 아이돌을 사랑했다.
내 나이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향유해 온 문화들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촌언니 딸이 2010년생인데 '무한도전'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엄마한테 듣고 놀랐다.
'무한도전'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즐겨보다가 7년 전에 끝난 프로그램이라
중학생인 그 아이가 어렸을 땐 본 적이 없을 텐데 그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니 신기했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이젠 내가 '옛날 사람'이어서 많은 걸 경험한 게 좋다.
이미 지나갔기에 그 시절이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다.
내가 덕후이던 시절마다 인생에는 늘 힘든 구간들이 있었지만
불행을 꺼내보기보다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꺼내보기로 했다.
*아모르파티(Amor Fati)로 가는 열여덟 번째 마음가짐
과거는 항상 뭔가를 사랑했던 시간들이었다. 문화격변을 겪으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자.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글쓴이/그린이: 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