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영화] 하마터면 문과에 갈뻔했다
어 퓨 굿맨
학창 시절부터 과학/수학을 좋아하던 전형적인 이과 성향인 저에게도 문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딱 한번 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화 어 퓨 굿맨(A few good man)을 보고 였습니다.
92년 개봉한 어 퓨 굿맨은 극장에서 본 것은 아니고, 집에서 우연히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제목의 뜻도 잘 모르고 본 초등학생이었지만 법정에서 코드 레드를 외치는 잘생긴 톰 크루즈를 보고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어린 나이에는 단순히 나쁜 해병대 대령을 잡는 멋진 변호사의 이야기로 생각하고 정의를 지키는 변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을 뿐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았을 때는 어린 시절 보지 못했던 더 많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영화라 간단히 줄거리를 위키백과에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신참 군법무관인 데니얼 캐피 중위는 하버드 법과대학원(Harvard Law School)을 졸업하고 전 법무장관 아버지를 둔 능력 있는 법률가이다. 그러나 타고난 법률가적 능력을 감추고 열정 없이 일을 대충 끝내고 소프트볼을 하기 바쁘다. 단 몇 달만에 40개의 사건을 법정 밖 합의(Out-of-Court Settlements)로 대충 처리하고 넘어가는 캐피는 해군 상부의 고위 장교들에 의해 관타나모 기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변호팀을 맡게 된다.
미 관타나모 기지는 미국의 적국 쿠바에 둘러싸인 기지로 해병대 부대가 위치하고 있다. 해병대 부대 지휘관인 제셉 대령은 산티아고 일병이 감찰부, 상원의원 등 군내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 내부의 일을 알리며 전출을 요구하는 등 지휘체계를 무시하는데 매우 분노하는데, 부대원에게 따돌림을 받는 산티아고 일병의 전출요청에 대해 전출시키자는 참모장의 건의를 묵살하고 소대장 캔드릭 중위에게 산티아고를 '훈련'(Code Red)을 시킬 것을 명령한다. 산티아고 일병은 같은 소대원 2명에게 코드레드(일종의 얼차려) 당하다 사망하고 그 2명은 살인 등 여러 가지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그리고 얼마 후 국가안보위원회로의 영전이 예정되어있는 제셉 대령은 그간의 사실을 은폐하고 2명의 병사에게만 책임을 지운다. 타고난 법 감각의 캐피 중위는 처음에 어려운 싸움임을 직감하고 검사 측과 가능한 최선의 타협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정의를 추구하는 조앤 소령과 함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법정에서 싸우게 된다. 이들 변호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셉 대령은 법정에서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씌우고 캔드릭 중위와 함께 수감된다.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서 사건을 저질렀던 두 해병은 결국 살인혐의 등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결국 불명예제대를 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에 명확하게 나누어졌던 착한 편과 나쁜 편이 나이가 들어서 보니 불명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캐릭터마다 사연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판단에 많은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톰 크루즈가 맡은 주인공 캐피 중위는 열정은 없지만 상황 판단이 빠른 천재 엘리트입니다. 하지만 훨씬 뛰어났던 아버지의 그림자에 괴로워합니다. 사실 캐피 중위의 열정을 없앤 것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을 열과 성을 다해서 해도 어딜 가나 "누구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라면 자신의 열정을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대충 일을 하는 이미지를 만들었고, 그럼에도 패소를 할 경우 생길 자신의 열등감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항상 합의로 빨리 사건을 끝냈을 것입니다.
자신이 변호를 맡았고 직급도 자신보다 낮은 두 명의 군인에게 무시를 당한 캐피는 싸우자니 어렵지만 타협을 하지 않을 것 같은 군인들의 태도에 초반에는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점 재판이 진행될수록 캐피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군 규율 집을 낚아채면서 "여기 화장실 위치가 어디냐"라고 묻는 장면이 너무나도 멋있었고, 생소한 재판극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셉 대령이 자백을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사람의 성향을 이용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떨쳐내는 느낌이었습니다. 캐피 중위에게는 정의 구현보다, 본인을 옭아매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떨쳐 낸 것이 더 큰 의미였습니다.
줄거리 요약에는 빠져있지만 데미 무어가 맡은 캐피 중위를 도와 변호를 하던 조앤 갤러웨이라는 캐릭터 역시 시사점을 줍니다. 캐피 중위에 비해 실력이 많이 떨어지지만 항상 정의를 말하는 원칙주의자로서 캐피와는 항상 대립각을 세웁니다. 단순히 정의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정의롭지만 사실 실수로 인해 거의 재판을 지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캐피가 각성하는데 한몫을 하기도 했지만.
정의를 구현하는데 정의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예전 보수당 이름이 한나라당이었던 시절, 한나라당의 부패가 여기저기서 터지자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는 프레임을 퍼트렸는데 이는 상당히 효과적인 문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운동권 이미지가 있었고, 공부를 안 하고 투쟁만 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정의롭지만 이런 세력에게 정권이 맡겨지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프레임이었습니다. 지금의 민주당이 선전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우선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계각층에 좋은 경력을 이룬 사람을 영입하고, 판사, 변호사 등 소위 공부 좀 한 사람들이 많이 배치가 되어 기득 세력의 전략에 잘 휘말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잭 니콜슨의 명연기로 구현된 재셉대령은 어렸을 때는 천하의 비열한 악인같이 생각했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현실에서도 수많은 제셉 대령이 있습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열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심으로 국가를, 혹은 자신의 단체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희생하는 마음으로 수행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셉 대령이 비열한 사람이었다면 재판 마지막에 새파란 애송이 변호사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했을 때에도 자백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군 집단의 규율을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힌 것이며, 총알이 오가는 전쟁터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행위는 애국심에서 오는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시켜서, 국민의 요구에 따라, 나라 경제에 오는 타격을 고려해서,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정해놓은 법을 위반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비열하게 저런 단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진심으로 신념을 가지고 저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불법을 저질렀으니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면 쉽겠지만,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캐피와 조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샘 와인버그는 온화하게 상황을 조정하지만 딱 한번 크게 화를 내는데, 역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영화 내내 재셉대령은 악인이고 재판을 받는 2명은 불쌍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지만, 약자인 산티아고 일병을 괴롭히다 죽음에 이르게 한 2명의 병사에 대해 유일하게 비난을 한 사람은 바로 샘입니다.
명령에 따른 2명의 당당하고 긍지 높아 보이는 태도에 넘어가면 그들의 잘못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유태인을 간접적으로 학살한 아이히만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보면 과한 걸까요? 그리고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좀 떨어지고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왕따 시키거나 사적인 처벌을 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조직의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많은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경우에 화가 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사적인 처벌에 대해 선과 악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문과에 갔다면, 운 좋게 변호사가 되었다면 아마 영화처럼 멋진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현실을 보면 자백 한 번으로 권력자를 바로 구속하지도, 무죄를 선고하지만 2명의 병사의 죄를 물어 명예 제대를 시키지는 않는 공정한 판사를 기대하기도 어려워 보입니다. 아니, 재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지금 돈과 권력을 좇는 많은 법조인들도 대부분 멋진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 열심히 공부를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나쁘고 좋은 사람이라고 나누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각자의 말 못 할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의의 편이 되고 싶네요. 제가 변호사가 되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