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평등하다는 착각
과거 계급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어느 시대나 계급 제도는 존재하였을 겁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모든 시민이 토론하고 투표를 하였다고 알려진 국가인 아테네도 사실 수많은 노예들의 노동 위에 이룩되었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누군가가 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 실험도 진행 중이지만 아직까지 성공적이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창세기에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며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평생 땅을 갈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살 수 있는 고통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인지, 일을 하지 않고서는 소위 먹고살 수가 없습니다.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노동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점차 체계를 잡기 시작하고, 계급을 나누게 되는 일은 자연계의 진화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소수의 계층은 상당히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계급이 나누어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구도 낮은 계급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으며, 누구나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인간의 본성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보다 낮은 계급으로 떨어지게 될 불안함이 더 큰 사회에서 이 계급은 고착화될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역사에서는 계급 간의 긴장감 속에서 줄타기하듯 계급이 유지되는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이 뒤바뀌어도 자신의 계급 올라간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시대에 적응하여 살게 됩니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혁명이 일어나면 떨어질 일밖에 없기 때문에 계급 유지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낮은 계급 사람들의 불만이 너무 크면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어 부와 자유를 조금 향상해 주기도 하고,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급에 열심히 살도록 주입시키기도 합니다. 왕=신이라는 식의 사상을 활용하여 대들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며, 심오한 종교적 사상을 통해 업보에 따라 지금의 계급이 정해졌다는 카르마(Karma) 사상을 퍼트려 계급 고착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습니다.
상위 계급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급이 뒤집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급투쟁은 상위 계급끼리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왕조가 바뀔 때는 높은 분들끼리의 왕권 싸움이 있었을 뿐, 피지배 계층은 누가 왕이 되거나 상관이 없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높이 기리는 것을 보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없었으며 상당히 유니크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어나기 힘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난 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부르주아 계층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왕=신이라는 사상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세뇌도 잘 먹히지 않게 됩니다. 왕과 귀족은 평민과는 종족이 다른듯한 느낌이었는데, 이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높은 계급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납득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은 계급을 나누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 때문만 아니라 인간은 끊임없이 주위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설사 AI와 로봇 기술이 미친 듯이 발전하여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된다 해도, 다른 누군가와의 차별점을 가져가려 할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평등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누구도 평등을 원하지 않기도 합니다. 계급 구분의 기준이 사라진 후, 모순적인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체제는 과거의 체제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내가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죠.
*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프랑스의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 정신과 의사 자크 라캉 철학을 대표적인 문구
** 오로빌(Auroville) : 인도 동남부 퐁디셰리 근처에 위치한 공동체 마을. 이 마을이 주목받는 이유는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장 흥미롭고 이상주의적인 일종의 실험을 하는 공동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무위키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