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와 달과 풀 Jul 14. 2024

가슴 한 켠 아픈 기억!

그녀의 마음을 막지 못했다.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후배 문희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나의 동기이자 내가 제일 아끼는 그녀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출근을 못하고 있으며 죽고싶다는 얘기를 한다는 얘기였다.


내가 처음 그녀를 알게 된  해 1995년 봄!

그녀는 11월에 세상을 달리하겠다고 말을 했었고, 나는 수시로 그녀의 마음상태를 체기 위해 전화를 규칙적을 했었다.   

"오늘은 마음이 어때요?"

마음 안부를 물으며 이런 저런 얘기들도 물어보고 나누었었다.

그녀는 내게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으며 그 세 번 실패를 하고 살고 있다는 얘기를 가볍게 담담히  말했었다.  세 번의 자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성공할 수도 있겠기에 나는 걱정이 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그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우울증이 극심하여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고 죽을 것 같다는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혹여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내 전화를 받았다.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녀 집앞으로 차를 타고 데리러 나갔다.  그녀의 모습은 헬쓱하지만 늘 그렇듯이 단아하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잘 먹지 못한다고 해서 소화가 잘 되는 백숙을 예약해서 먹으러 갔다.

이층 식당에서 마주하고 앉은 그녀는 생각보다 그리 나쁘진 않아보였다.  

그녀는 쓸쓸하고 힘없는 웃음을 보이며 "살려고 나왔어요"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담담하며 슬픈듯 했다.

그리고 자기 얘기를 담담히 기 시작했었다.


그녀는  최근 서울에 사는 대학생  딸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최근 딸아이의 월세걱정도 한다고 했다.  


십년도 더 전 그녀의 남편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돈사고를 쳤고  대출을 은행 뿐만 아니라 이웃 할머니에게서도 돈을 빌리고 값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일로 인해 억단위의 빚이 생겼으며, 그 후유증으로 그녀는 사람도 잘 만나지 않고 아이들 학원도 보내지 못하며 그 큰 빚을 값기 위해 그녀는 최소한의 돈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당연히 그녀는 비싼 옷을 사지 못했으며,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대신 그녀는 매주 아이들을 공립도서관에 가서 독서를 꾸준히 하게 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학원을 가지는 못했으나 꾸준한 독서를 통해 기본적인 학습능력을 길렀으며 머리좋은 그녀를 닮아서인지 둘 다 좋은 성적으로 대학교를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남편이 진 큰  세월이 가도 메꾸어지지 않았는데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 된 딸아이의 월세를 걱정하는 처지라고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몸이 많이 좋지 않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에 난 커다란 공허함과 딸아이로 부터 받은 깊은 상처인 듯 했다.  몸과 마음 모두가 크게 다친 듯 했다.


지난 몇년동안 그녀는 줄곳 내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도 딸아이 뒷바라지를 해야 해서 밥한끼 하러 나올 수 없다고 하며 나오질 않았다.

딸아이 방청소, 빨래, 집정리, 공부, 현장체험 등등 그래서 그녀는 퇴근후도 바쁘다고 했다.  그런 그녀의 인생을  오로지 딸아이를 위해 보내는 듯 보였다.  직장생활 외에는 사람을 그렇게 만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이 없으니 얻어먹기만 할 수도 없었고, 한 번쯤은 밥을 사야했기에 그것마저도 부담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녀의 딸이 초등학교시절 그녀는 이혼을 원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 이년이 되고, 삼년이 되고 십년도 더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을 포기한 듯 했다.

그녀는 이혼을 말한  이후로 아이들에게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언제 엄마자리를 내놓고 떠날지 모르니 좋은 기억만 주고싶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소리만 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만 산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서 아이들은 전부였고 그 전부였던 그 아이들을 정성껏 뒷바라지 했고, 두 아이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둘째 딸아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그녀는 매일  딸아이의 현재와 장래를 위해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 정보를 알아보고 알려주고 하며 매일 한 시간넘게 통화를 한다고 했다.   딸아이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오로지 딸아이를 위해 그녀의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녀의 딸은 전화기에 대고 울면서 원망을 쏟아냈다고 한다.

"엄마 아빠때문에 좋은 대학교도 못가고 이게 뭐야. 다른 친구들은 저들 가고싶은 좋은 대학교 다 갔는데 나는 이게 뭐야. 엉엉"

한시간도 넘게 딸아이는 그녀에게 그런 모진 원망을 쏟아내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은 좋은 대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녀의 둘째는 대학등록금이 싼 시립대학교를 들어간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은 그녀는

"그녀는 내 인생은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오로지 아이들만 바라보고 산 인생이었는데 딸아이로부터 그 얘기를 들은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십여년을 넘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엄마라 생각하고 다른 욕심 다 버리고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살아왔는데 몸도 마음도 지친 그녀에게 철없는 딸아이의 원망은 그녀의 가슴에 비수가 된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전부였던 아이에게 자신을 모두 쏟아부었는데 그 아이가 고마워하기보다 원망을 하고 있으니 그녀는 자신의 삶이 허망하게 느껴졌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이제 자기 사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며, 이제 아이들도 많이 자랐고 하니 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보고 살자고 하며 식사를 했다.

그랬다. 살아보니 내 인생을 나만큼 아파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 아픔을 나만큼 공감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 아픔을 잘 아는 사람도 없고, 한 가정에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사는 여자가 아플 때 가족들은 다만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이기 이전에, 아내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돌봐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그날 헤어지고 나는 그녀가 삶에 대한 애정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말에 공감했고 자신의 인생을 돌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날 이후로 괜찮을 것이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며칠후 전화를 했을 때 그녀는 마사지실에 있다고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마사지실에서 마사지를 받고 있다는 말에 잘 하고 있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긴 얘기를 못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게 내가 들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녀는 늘 자신을 정신적으로 괴롭혀오선 홀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자신의 몸을 허공에 던졌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정성을 쏟았던 자녀로부터..... 자신을 경제적으로 짐을 지운 남편으로부터 .... 그리고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시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녀의 비보를 듣고 장례식을 찾았다.  그녀의 남편은 많이 슬퍼보였지만 나는 곱게 볼 수가 없었으며, 서울에서 그녀의 소식을 듣고 나타난 철없는 그녀의 딸의 구슬픈 눈물마저 동정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소중했고

그녀에게 전부였던 그 딸아이의 눈물!

그리고 마지막에 좀 더 굳건히 잡아주지 못한 나!

 그곳에서는 오로지 자신만을 돌보며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며 평온하길 본다.

친구!  좀 더 잘 잡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그곳에서는 평온하게 잘 지내~~~~~~~


작가의 이전글 병원일기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