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수많은 문화재들 중에서 한국인이 가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것은 첫번째로 썼던 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과 이번에 소개할 법륭사일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거쳤다면, 성인이 되기 전에 교과서에서 한 번은 보게 되어있다. 가보지 않아도 기본적인 친숙함이 있다. 법륭사의 원음인 호류지(法隆寺, ほうりゅうじ 정확히 호-류-지가 맞다)로 표기되있는 경우도 많아 이름이 반갑기까지 하다. 고구려의 담징이 건너가서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는 백제의 왕인과 함께 놓아 항상 헷갈리는 국사 단골 문제였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한반도의 우리 민족이 일본에 전해준 기록은 무조건 외우게 했으니 자격지심이 아닌가 싶을 정도. 우리나라 태자 이름도 모르는데 바다 건너 왜국의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성덕 태자) 이름까지 알아야 하냐고 푸념을 늘어놓았던 적도 있는데 어느새 내가 법륭사에도 왔다.
법륭사는 찾아가기 쉽다. JR을 타고 칸사이본선(関西本線)만 따라가면, 오사카에서 50분 정도 지나 법륭사역(호류지역)이 있다. 나는 돈 한 푼 아끼겠다고 킨테츠선을 타고 갔다가 한참을 돌아서 갔는데, 시간이 금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허투루 쓰는 것이 아까웠는데 고작 한화로 몇 천, 몇 백원 차이나는 것 때문에 더 많은 기회를 놓친 것 같다. 사람이 대범해질 필요가 있다.
법륭사역에서 법륭사 가는 길은 인적도 없고 한적하다. 우리나라 시골 읍내 정도다. 교토에 비해 확실히 낙후 되있다는 느낌이 크다. 크게 국가 차원에서 '나라'보다는 '교토'를 밀고 있는 느낌이다. 교통편도 불편하고, 법륭사가 조금 동떨어져있긴 하지만 관리가 덜 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한국의 시골인지 일본인지, 지나가는 차들의 방향이 좌측 통행이 아니면 분간하기 힘든 길을 계속 걷다 보면 법륭사가 보인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가 크게 있는데 인적이 드물어 을씨년스럽다.
"성덕종 총본산". 쇼토쿠 태자는 하나의 종파로 분류될 정도의 반열에 있다. 국내도 잘 모르지만, 일본 불교 종파는 훨씬 많은 듯하다. 법상종에서 1950년에 독립하여 1952년에 정식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법흥왕이나, 소수림왕 같이 불교를 들여온 때도 그 왕을 종파로 만들지는 않았는데 유독 쇼토쿠 대자의 인기가 높은 듯하다.
소나무길. 유 교수가 산사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이 이해가 됐다. 평지임에도 시야가 가려져 산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있다. 소나무가 아니라 벚꽃길이었다면 어울리지 않았을까? 어울리지 않았더라도 분명 봄에 관광객은 몰려들었을 것이다. 다 저마다 의미가 있을진데 그대로 즐기는 멋을 잃어버렸다.
이날 새벽공기가 무겁고 다소 침울했는데,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아졌다. 소나무길을 지나 처음 맞이해주는 남대문. 보자마자 "어?" 하고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왠지 한국에 와있는 것 같았다. 전형적인 일본의 수직으로 내려오는 처마가 아니여서였을까. 이상하게 한국의 기와집을 보는 듯한 기분. 기본적 건축양식에 무지하니까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모든 것이 순전한 지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있으니. 처음 왔음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상상 이상으로 규모가 넓었다. 절이라기 보다는 궁궐 같은 느낌. 쇼토쿠 태자의 궁터에 지어서인지 모르겠다. 지붕의 수막새나 장식들이 화려하면서도, 친근하여 혼자서 이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 지었다는 근거도 없는 확신을 가졌다.
말이 열 마리는 동시에 뛰어다닐만큼 넓은 진입로. 꼭 8대 불가사의 같은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옛날에 어떻게 이런 길을 닦고 건물을 지었는지 똑같이 신기하다.
또 찍으면 안되는데 사고를 쳤다. 백제관음상. 난 전생에 백제인이었을 거라는 망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