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기쁨"

기쁨은 어디에서 올까요 - 내 안에서, 아니면 세계와의 흐름 속에서?

by 룡하

의식의 지향성을 감안할 때,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37)으로 정의되어질 수 있다. 내 정서와 그것의 "원인처럼" 표상된 외부 대상 사이에는 객관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어떤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하여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38)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이 원초적 정서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연적으로 결정된 외부 원인을 배제했을 때, 사랑과 혐오는 기쁨과 슬픔이라 두 원초적 정서의 변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후 모든 정서들은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혹은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일종의 내적 체험으로 나타난다.39) 전자가 기쁨의 감정이고, 후자가 슬픔의 감정이다. 여기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점이 두 감정의 비대칭성이다.


37) Eth. Ⅲ, 부록, 정서의 정의 6.

38) Eth. Ⅲ, 명제 15. Cf. 명제 56 : "기쁨과 슬픔과 욕망에는 그리고 마음의 동요와 같이 그것들로 합성된, 또는 사랑, 증오, 희망, 공포처럼 그것들에서 파생된 모든 정서에는 우리들을 자극하는 대상의 종류만큼 많은 종류가 있다."

39. Eth. Ⅲ, 부록, 정서의 정의 2와 3.


출처 : 김원철. (2009). “욕망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다” (cupiditas est ipsa hominis essentia) -『에티카』 3부 부록을 통해 살펴본 스피노자의 인간학-. 범한철학, 55(4), 169-196.


본 논문은 스피노자의 윤리의 실천으로서 관용과 사랑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이 최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탐구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다.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은 더 완전해지려고 노력한다. 즉 인간은 더 완전한 상태로의 이행인 기쁨을 바라고, 덜 완전한 상태로의 이행인 슬픔은 피하려고 한다. 개개인의 욕망과 정서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이것들을 사회생활에서 조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서나 욕망이 아닌 이성이 필요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이성을 통하여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은 타인과 맺는 관용의 관계에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유를 허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관용(tolerance)이고,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이러한 관용과 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게 해줌으로써 인간의 최고의 완성과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해 준다. 이 논의를 위해 2장에서는 먼저 관용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3장에서는 관용을 덕의 측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4장은 『에티카』에 나타난 사랑을 분류함으로써 관용과 사랑을 통한 인간의 완성과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해 논의를 할 것이다.


출처 : 박삼열. (2011). 스피노자의 관용과 사랑. 철학연구, 118, 99-121.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더 완전해지려고 한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완전한 상태로의 이행인 기쁨을 바라고, 덜 완전한 상태로의 이행인 슬픔은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은 사랑하고, 슬픔을 주는 대상은 미워한다. 이렇게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나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은 나를 더 완전하게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슬픔을 주는 대상은 나를 덜 완전하게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데까르뜨처럼 이러한 감정은 영혼의 정념(passion)이므로 인간이 벗어나야 할 부정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정신이 이것을 지배하여야 하는 것인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두 경우를 모두 거부하고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그는 우선 감정을 수동감정과 능동감정으로 구분하고, 이를 부적합인 인식과 적합한 인식과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정념, 즉 수동적인 감정은 부적합한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능동감정은 정념의 예속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예속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부대상에 대한 적합하게 인식하는 데 있다. 인간 정신은 능동적으로 인식해서 타당한 관념을 가질 때, 모든 수동감정에서 벗어나서 기쁨과 욕망이라는 능동 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정념으로서의 사랑도 같은 방법에 의해 능동적인 사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식론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이용함으로써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길이다. 이 길에서 우리는 인식의 최고 단계인 신에 대한 인식에까지 다다를 수 있다. 신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고, 이 기쁨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지적인 사랑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고, 최고의 정신적 만족을 얻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최고 행복인 것이다. 그럼 예비적 고찰을 거친 후에, 스피노자의 세 가지 사랑 개념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기로 하자.


출처 : 박삼열. (2004). 스피노자의 사랑 개념. 기독교사회윤리, 8, 147-184.



햇살 좋은 날 걷다 보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쁨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내 몸을 통해

흐르는 순간일 때가 많습니다.



스피노자, "기쁨"


스피노자는 "기쁨을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일종의 내적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더 완전해지려고 노력합니다.

햇빛, 바람, 노래 소리처럼

외부의 조건이 나를 열어줄 때,

나는 기쁨을 경험합니다.



생활 속 실천


오늘 기쁨을 느낀 순간을 기록해 보세요.

예 : 햇살 좋은 날 점심 산책

그리고 그 순간이 어떤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는지 살펴보세요.

기쁨은 결국 나와 세계의 공명입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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