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분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불필요한 것에 얽매여 있을까요?
저자가 그리고 강조하는 '삶'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을 서양철학사에서 '견유주의(犬儒主義)'의 스승으로 불리는 디오게네스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견유'는 '개 선비'나 '개 같은 선비'로 풀이된다. 저자는 퀴니코스학파('퀴니코스'는 '개'라는 말이다.)의 주창자인 디오게네스가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다. 왜냐하면 내게 선물을 가져온 이에게는 사슴처럼 온순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무섭게 짖는다. 그리고 사악한 이들은 (아예) 물어뜯는다." 언젠가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대왕이 그를 붙잡아 물었을 때도 "누구냐"라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네 탐욕의 정찰병(kataskopos)이다." (31, 32쪽)
저자에 따르면, 견유주의자는 아무런 보호(피난처, 집, 나라)도 없이 인류에 앞서 냄새를 맡고, 용기를 내서 그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한다. 저자는 디오게네스가 만물 속에는 만물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는 점을 들어 삶과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리를 끄집어낸다. '평등'과 '연대'가 그것이다.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디오게네스의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법 이전에, 심지어는 법 없이도 모두 평등한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디오게네스에게 고향을 물었을 때, 자신은 '세계(우주)의 시민(코스모폴리탄)'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시사적이다.저 머나먼 고대 시기에 세계 시민을 꿈꾸던 한 '개 선비'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편을 가르고, 스스로를 가두는 경계선 안쪽에만 머무른 채 협량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자칭 '세계 시민'들이 한 번쯤 진지하게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출처 : 정은균, "스스로 개가 된 철학자, 무엇 때문이었을까", 오마이뉴스, 2014.02.13,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7651&isPc=true
안티스테네스를 뛰어넘어 견유파 사상을 정립한 자는 터키 동부 시노페 출신의 디오게네스(기원전 412~기원전 323)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디오게네스와 그 제자들의 몸가짐을 폄하하여 ‘시닉(cynic)’, 즉 ‘개’라고 불렀다. 이로 인해 후대 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을 ‘견유파(Cynicism)’로 명명하였다. 견유파는 기원전 4세기에 태동하여 기원후 5세기까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를 작동하는 중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마지막 견유파 철학자 살루스티우스는 로마시대 신플라톤주의자 프로클로스와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흡수되었다. 견유파가 담고 있는 냉소주의는 정치, 도덕, 종교, 문학, 그리고 철학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냉소주의는 오늘날 정치에 대한 신문과 TV 등 미디어 냉소주의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디오게네스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그는 극단적인 육체적 금욕주의가 자신이 원하는 도덕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당시 아테네에서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신의 깊은 생각과 말, 그것을 잘 전달하는 수사학적 능력이었다. 하지만 견유파는 생각과 말이 아니라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의미에서 견유파는 서양철학의 창시자인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삶의 방식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주장한 존재론적인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였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소크라테스와도 조금 달랐다. 소크라테스는 국가라는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개인의 자유는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디오게네스에게는 개인이 가장 중요하며 국가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체계가 아니라고 봤다. 이 사상은 후대 무정부주의의 중요한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견유파 철학자들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의 글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리스, 로마, 그리스도교 교부(敎父), 이슬람 학자들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냉소주의를 비판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나 그리스도교 교부들, 그리고 냉소주의를 찬양한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나 줄리안의 글들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디오 그리소스톰이 디오게네스에 대해 남긴 글들도 마찬가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디우스가 남긴 ‘탁월한 철학자들의 생애들’ 6권에 기록된 디오게네스에 관한 기록들도 스토아 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글에서 일관되게 표현된 견유파의 철학적인 영감을 추려낼 수 있다.
출처 : 배철현, "디오게네스의 ‘이성적인 삶’", 주간조선, 2017.05.12,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25
견유들은 인간이 비이성적인 욕구와 문명의 속박이라는 사슬에 묶인 노예와 같은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로부터 철학의 임무는 인간을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덕을 획득함으로써 현자가 되어야 하는데, 견유들은 수련이야말로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견유들의 수련은 대부분 자연에 따른 삶을 훈련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인간이 내적인 욕구와 문명에 속박된 노예와 같은 상태라면,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최대한 욕구를 줄이거나 억제하며, 문명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난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견유들은 이러한 수련을 통해 최대한 자족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였다. 이는 모든 속박과 의존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점에서 신에 가까운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견유들은 언제나 자신의 수련을 타인과 공유하고자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견유들이 보기에,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내지는 인류의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김유석 (2021). 견유 디오게네스의 수련(askēsis)에 관하여. 동서철학연구, 100, 229 - 254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더 좋은 것, 더 편리한 것, 더 많은 것.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에 묶입니다.
자유는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디오게네스, "견유주의"
디오게네스는 "인간이 비이성적인 욕구와 문명의 속박이라는 사슬에 묶인 노예와 같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최대한 욕구를 줄이거나 억제하며,
문명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야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생활 속 실천
오늘 하루, 하나를 덜어내 보세요.
자연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추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스스로 충분한 존재였습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