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나를 쭈뼛쭈뼛 내심 들뜬 마음으로 기웃거린다
업무 종료한 지는 이미 며칠이 흘렀지만 공식적인 퇴사일은 내일이다. 이제 진짜 직장이 없는 존재가 된다. 이제껏 미뤄왔던 소설 창작을 위해 글감을 모으고 있다. 시놉시스랄까 글의 얼개와 주제는 생각했는데 아직 디테일이 부족하다. 주인공의 직업이나 그가 가장 가슴 떨려하는 작가 같은 것들. 그가 변하게 되는 에피소드의 부피나 그와 나의 거리 같은 것들.
콘텐츠 마케터로 일하면서, 또 PR 매니저로 일하면서 글은 줄곧 써 왔다. 취미로 영화 평론을 하고 있으며 종종 블로그나 브런치를 통해 수필을 쓰기도 한다. 형식과 관계없이 글에는 언제나 내가 약간씩은 들어가 있었다. 직장에서 나를 드러냈을 때는 동료가 내 고약하게 유약한 마음을 눈치채 버릴까 초조해했다. 하지만 동료를 포함한 독자들은 솔직한 내 모습을 좋아했다. 인간이 인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고뇌하는 존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찌질함과 실패와 흔들림. 인간미라는 말은 보통 나사 하나 빠진 정도의 부족함을 발견할 때 사용하잖나. 직장에서의 글쓰기는 인간미로 부를 수 있는 정도의 나를 드러내면서 회사의 이미지를 다져나가는 것이었다.
소설은 조금 어렵다. 내 경험에서 자극을 골라내어 내가 아닌 이야기로 치환해야 한다. 회사의 이미지를 다져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아닌 소설도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소설은 그렇다는 것이다. 익숙지 않은 일이라 그런지 한 문단 넘어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다. 그저 문장을 입안에 굴려보는 것과 다른 일이다. 플롯을 파악하고 주제의식에 대해 파고들고. 그 소설에 대한 평론이 붙어 있을 때는 나는 왜 이렇게나 분석적으로 글을 보지 못할까 반성도 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한가롭고 속보기에는 요란스럽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아침 러닝처럼, 그러니까 버릇이나 습관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습관처럼 문장을 적는 일은 습관처럼 문장을 읽는 일보다 곤란하다.
얼마 전에는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서 올해의 화두를 파악했다. 몇 개의 굵직한 주제가 있었지만 내가 담아 온 건 수많은 여성들이 수많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문학은 그것을 성실하게 반영하는 중임을 실감했다. 혼자인 데다 처음 방문한 거라 걷는 내내 쭈뼛거렸지만 내심 들떴다. 그리고 오늘은 흐린 날씨에 어울리는 무채색의 카페에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브런치 글을 내내 찾아보다가 내 글도 살짝 남긴다. 평소라면 먹지 않았을 딸기크림 브리오슈를 이따금 베어 물면서. 평소에도 물처럼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가득 머금고서. 일 년 중 가장 낮의 길이가 길다는 하지의 밀도를 높여 본다.
막막한 내일을 이유 삼아 세상과 나를 쭈뼛쭈뼛 내심 들뜬 마음으로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