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초지현 Sep 21. 2023

우리 아이는 F?!

오래된 노트북을 업데이트하여 열어본다.

10년 전에 산 노트북인데 겨우 문서작업과 인터넷 검색정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을 깔아 할 수 있을 만큼의 성능은 되지 못하기에 철저하게 문서작업이 위주인 노트북이다.

코로나로 아이가 학교를 가지 못할 때 줌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 노트북을 아이와도 함께 사용하였다. 아이가 혼자 놀면서 한글 자판 익히기 게임을 하기도 하고, 한글 파일을 열어 빈 페이지에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사를 적기도 했다.

한 번씩 노래가사를 큰 글씨로 적어 프린트해 달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외우고 싶은 노래가사만 적는 줄 알았다.




바탕화면의 파일들을 정리하다 보니 아이 이름이 적힌 파일이 있어서 뭔가 싶어 열어보니 몇 편의 시가 적혀있다.

어디서 보고 적은 건지 아이가 직접 지어 적은 건지 모르겠다. 아이아빠말로는 아이가 직접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건 정말 노래가사 같기도 하다.  


   너의 마음


너의 마음속에 내 마음

운명은 너 마음에 걸려 있어

모든 것이 두근 되고 긴장 되는 순간

너의 마음은 어떨지 너무 궁금해

너도 왠지 두근 될 것 같아

너의 마음 내 마음

너가 무슨 말을 할 지 너무 궁금해

너가 네 곁에 있어줘(I Love you)


        너의 사랑


난 너의 사랑을 이해해

하지만 너무 사랑 하지는 마

나의 사랑이 식어 버릴지도 몰라

식어 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 버려 그래도 너무 슬퍼 하지는 마

나의 사랑이 되돌아 올지도 몰라

하지만 사랑이 식어 버릴지도 몰라



           너의 생일


오늘은 너의 생일 너를 위해

선물을 준비 해야하지 선물은 케이크

내가 가는 동안 넌 나를 기다리고 있지

우리의 마음 영원한 사랑 영원한 우정

함께 소리 크게 질러봐 빨리 오라고

내가 빨리 갈게 하지만 케이크가


중간에 안 맞는 어법도 보이고 <케이크가> 다음에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아이가 적은 시 같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갖고 온 노래가사를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아이가 적은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저런 감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궁금해졌다.  유튜브를 많이 본 탓일까 아니면 20대 초인 사촌누나들과의 왕성한 교류로 인한 것일까?

문서 작성일을 보니 작년이었는데 그때면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시는 <나뭇잎>이었다.


  나뭇잎


하늘에서 쪼로록 내려오는 나뭇잎.

이슬도 빛이 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늘에서 쪼로록 내려온다.


이슬도 나뭇잎과 같이 또로록 내려온다.

나무에 걸려 있는 나뭇잎.

바람이 불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은 나뭇잎.

봄엔 초록초록

여름엔 노랑노랑

가을엔 빨강빨강

겨울엔 하얀색인 눈이 나뭇잎을 덮어 준다.



아이가 적은 시를 보니 아이의 세상에는 나무가 있고, 이슬이 있고, 빨강초록노랑 다채로운 색깔들이 있었다.

쪼르륵, 또로록, 후두룩이라는 단어로 운율을 맞춘 것과 색깔을 4음절로 2번씩 강조한 것도 눈에 띄었다.

문득 너무 궁금해서 아이의 2학년 1학기 국어책을 들춰보니 제일 처음 나오는 단원이 <시를 즐겨요>이다.


           윤동주


우리 아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아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시로 운율을 익히고, 시의 느낌을 흡수한 모양이다.

아이의 학교책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그 나이였을 아이가 적은 필체와 아이가 읽었을 글들과 배웠을 내용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아이를 독립시키기 전에 이 교과서들을 먼저 비워내고 떠나보내야 할 것임을 안다.

쌓여가는 교과서들의 무게가 아이 자라나는 시간과 비례한다는 것을. 

아이를 독립시키고 떠나보내야 하듯이 말이다.




오늘 발견한 시로 아이의 다채로운 세상을, 하나의 인격체로써 존중하게 되었다.

어쩜 나보다 더 넓은 아이의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의 시를 보며 또 하나 느낀 은 MBTI 유형 중에  F성향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T형과 감성적이고 대인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F형 중에서 아이는 단연 F형에 가까워 보인다.

앞으로 어떤 성향이 더 발휘되어 자랄지 기대되는 아이의 세상으로 오늘도 아이가 궁금하다.






이전 04화 하버드 갈 거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