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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Jan 24. 2024

시애틀에서의 새해 0

- 라라 소소 14

내가 기억하는 한 나의 새해는 늘 텔레비전과 함께 시작해서 텔레비전으로 끝났다. 때가 되면 가족은 모여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단지 순종한 거였을 뿐인데, 가족이 모여도 딱히 공통의 주제가 있는 게 아니어서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틀어놓고 그에 대해서 시시껄렁한 얘기만 늘어놓곤 했다. 나는 막 나가는 편도 아니지만 고분고분하고 순순히 하라는 대로 하는 편도 아니다. 차라리 방에 들어가서 책이나 읽고 뒹굴거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시시때때로 했다. 그럼에도 새해가 뭐길래, 1월 1일이 뭐길래, 새해부터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나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는 원망의 소리를 일 년 내내 듣고 싶지도 않아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도 집중력을 보이며 나름의 노력을 해왔다. 다행인 건 부모님 모두 바지런한 사람들이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나라의 어른 생활을 하신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구정이 진짜 설날이라고 생각하시는 고지식한 아버지는 타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다. 엄마는 가끔 자다가 일어나서 타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몇몇 해에는 우리 딸, 복 받아라,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데 왠지 그때는 기분이 좋았고 복이 나에게 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약간 그리운 말이다.


수능을 마치고 맞이한 첫 연말에는 보신각에서 새해 타종 행사라도 구경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 휩쓸려 거대한 에너지를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질어질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연말 대목을 노리며 새벽까지 연장 영업을 했던 카페에서 시급을 더 줄 테니 출근을 해 달라고 제안해서 그 유혹을 뿌리칠 재간이 없었다. 손님을 상대하느라 12시가 지난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일했던 기억이 있다. 12시 즈음에는 카페 안이 술렁거렸는데 아무도 소리 내어 카운트 타운을 하지 않았고, 12시 땡, 새해가 시작되었어도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띠며 키스를 주고받거나 주위에 축하를 건네거나 새해라는 설렘에 환호를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12시가 지나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걸 알 도리가 없을 수밖에.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연말, 그리고 새해는 이런 모습이었다.


내가 마주한 시애틀의 풍경은 한국과 달랐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 연초까지도 곳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약간씩 들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어느 장소에서든 여전히 반짝이는 트리와 조명이 그곳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후에는 휴가를 길게 내고 여행을 떠나거나 떨어져 있던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서 모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명절과 비슷하겠구나 싶으면서도 명절에 고생하는 한국 여성의 가사노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애틀에서 마주친 이들은 모두 기뻐 보였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 즐겁고 한껏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는 여성의 몫이 조금 더 크게 잡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기고 함께 한다는 기쁨이 이들에게는 더 크게 다가오는 게 우리나라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뜨거운 클램차우더와 아름다운 석양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우리는 하루에 하나씩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시애틀을 돌아다녔고 적당히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고 사람들 속에서는 평소보다 더한 에너지 소모로 기운이 달리는 나지만 신기하게도 그 일주일은 힘들지 않았다. 긴장이 많이 되지도 않았고 어울리는 그 시간이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은 몸도 마음도 또 금전적으로도 여유로웠고 자신들이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는 삶의 터전이 시애틀이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들어온 우리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이벤트였을 거였다.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받아준 그들의 순수함도 한몫을 했을 텐데, 그 순수함은 여유로움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들이 한국에 와서 우리가 그들을 대접해야 하는 순간 크게 느꼈고 나와 그들이 다르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스페이스 니들에 갔다. 엄마가 말했던 바늘 모양의 타워가 바로 이거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스페이스 니들은 N서울타워와 높이가 비슷해 보였다. N서울타워는 그 입구까지는 가보았지만, 아래에서 타워를 올려다보기만 했고 실제로 전망대에 올라가 본 적은 없다. 전망대는 스페이스 니들이 거의 처음 올라간 거다. -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어느 순간 전망대에 올랐을 수도 있으니 거의 처음이라고 써 보았다. 입구에서부터 스페이스 니들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고 둘러봤다. 내 주먹의 네 개를 합쳐 놓은 크기만큼 보다 더 큰 볼트가 역사 설명과 함께 벽에 붙어 있었는데 스페이스 니들 건설 때 실제로 사용했던 볼트라고 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타워의 설계는 집 설계와 어떻게 다른 과정을 거치는지도 알아보려고 그림을 보며 읽어보았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나의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고, 이제 막 건축에 입문한 건축학도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중앙에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직접 안내해 주는 걸 처음 경험해서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안내원은 자신의 직업으로 늘 반복하는 일이니 익숙하고 유창하게 설명을 했고, 빠르게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안내를 집중해서 듣다 보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우와, 시애틀 시내의 전경이 다 보이는 통창에 바닥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바닥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기조차 쉽지 않았다. 어린아이들과 어른 몇몇은 그곳에 눕거나 앉아서 아래의 모습과 멀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전망대를 즐기고 있었다. 바다가 보였다. 우리가 클램차우더를 먹었던 바다가 저기인가, 궁금하면서도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뜨거운 클램차우더의 향긋한 맛이 입가에 맴돌아 한 번 더 먹고 싶어 져 침만 꼴깍 삼키고 말았다. 흐린 하늘 아래 시애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들과 바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 서울과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른 모습이다.


서울의 밤은 아름답다. 야간 조명은 화려하고 광고판은 번쩍이고 빌딩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눈으로 볼 때에는 마냥 아름답기만 하지만 이는 심각한 빛 공해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스페이스 니들에서 조금씩 돌아가는 바닥에 서서 천천히 시애틀을 각각의 각도로 다시 0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360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시간을 재 본건 아닌데 어딘가에서 45분 정도 걸린다고 읽은듯하다. 서울에 살면서 N서울타워에 올라가 보지 못한 나와는 다르게 다들 한 번씩은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에 와 봤다고 한다. 우리를 위해서 또다시 올라온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즐겼다. 앉아서 서서, 혹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감상을 보태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일몰이 시작되었다. 날이 흐려서 파란 하늘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흐리고 회색빛이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바다 근처에는 대관람차도 돌아가고 있었다. 커다란 크기일 게 분명한 동그란 대관람차는 멀리서 작고 아담하게 보였지만 아름다운 보랏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연말, 새해, 이 모든 단어에는 로맨스가 포함되어 있을까?


제니는 사랑에 빠졌다. 시애틀에서 그 짧은 체류 동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시애틀에 온 이후로 계속 차 세 대로 나누어서 타고 돌아다녔는데 차는 두 대가 되었고 제니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시애틀로 넘어올 때 제니에 대한 기대를 밴쿠버에 이미 내려놓고 온 상태여서 크게 마음이 쓰이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앤디의 오래된 친구라던 그녀와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때 평범하지만 인상이 따뜻해 보이던 그 남자도 종종 우리와 동행해서 더 아무렇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준은 앤디와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함께 자랐다고 했다. 이웃에 살았고 부모님들이 서로 친구라 집안끼리 친한 데다 외동이라는 일치점도 있어서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앤디 없이 홀로인 준은 조금 슬퍼 보였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부터 12월 30일까지 시애틀에서의 일주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드디어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12월 31일. 소소하게 하루를 보내고 지인들이 갖다 준 음식과 우리가 만든 음식으로 이른 식사를 했다. 각자의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11시에 다시 모여 바닷가로 출발했다. 바닷가에서는 새해맞이 불꽃놀이 행사가 있다고 했다. 클램차우더 가게와 멀지 않은 바다라고 했다. 멀리서부터 해변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끌시끌 흥분된 분위기다.


5, 4, 3, 2, 1, 펑 펑 퍼버벙, “Happy New Year!”


시애틀의 새해는 화려한 불꽃, 환희에 넘치는 표정과 인사, 희망적인 모습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설렘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함이,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이, 누군가에게는 꽉 참이, 또 누군가에게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는 새해였다.


그 당시에는 한국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할 여유가 없었다. 그 시간을 즐기기만으로도, 어떤 감정인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만으로도 시간은 꽉 찼다. 하지만 나의 진짜 삶, 현실로 돌아오면서 느껴지는 그때와 현재의 괴리감과 그곳에 대한 동경은 조금씩 내 마음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문화차이도 있었을 것이고, 장소의 다름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있었던 곳은 바닷가였으니까. 한국의 바닷가에서 새해를 시작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자유로운 모습에 매료되어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그때는 그들 속에 흡수되어 나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있던 작은 세계에서 조금 더 넓은 세계로 한 발짝 건너가고 있다는, 조금은 성장했다는 그런 느낌.


나는 남들이 찬탄하며 바라보는 진주인데 구슬 밖으로 나와 진주조개의 넓은 공간을 바라보며 내가 있던 진주알이 너무도 작은 공간이었고 그 작은 진주알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조개가 살고 있는 드넓은 바다는 생각지도 못하고 내가 마치 뭐라도 되는 양 움츠리면서도 약간은 으쓱했던 그런 기분.


새해 복 많이 받자, 순이에게 미소를 보내며 뜨거운 클램차우더를 든 손을 내민다.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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