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라라 소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ara 라라 Feb 07. 2024

나는 무엇,

- 라라 소소 16

나,



1. 호르몬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핑계를 대는) 사람


- 여성은 한 달에 두 번 호르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보통은 한 번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따지면 두 번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생리 전후가 있다. 많이들 간과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는 배란기 전후다. 일반 사람들은 생리 기간만 눈에 띄는 변화가 있기 때문에 그 시기만을 호르몬의 변화를 겪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성으로 생식기가 약하거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다. 배란기에도 피가 나오고 통증이 있다는 것을. 일주일씩만 잡아도 한 달에 이 주일 간은 호르몬에 사로잡혀 있는 거다. 통증과 체력 저하는 기본이고 기분도 수시로 오르내린다.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주로 어둡고 비 내리고 습기 차고 흐릿한 날씨에 반응한다. 몸이 추욱 처지고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며 진한 회색빛 뭉치들이 마음속을 헤치고 다닌다. 그러다가 그것들은 머리를 점령하고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뇌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 사람은 지금 우울하구나 인정해 버리고 만다. 에스트로겐 수치의 감소와 오르락내리락하는 데로 이유를 돌려본다.


- '하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뇌는 금방 나의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조금은 괜찮아 지는 기분이들어 또다시 '하하하' 한번 더 더 크게 소리 내어 웃어본다. 때로는 몸을 흔들며 엉망으로 춤을 추고 피식 웃는다. 호르몬에 점령당하지 않기 위해서.





          

2. 어차피 내려올 건데 산에는 왜 올라가냐고 묻는 사람


-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지만 오르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싫어 하지만 오르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생각도 다양한데 행동은 그보다 더 다양하여 예측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산에 올라가면 무릎이 아프고, 다리가 쑤시고, 숨도 차고, 발바닥도 아프고, 등등 비효율적이고 건강에 해롭다는 투정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려올 거니까 그렇게 힘들일 필요가 있냐는 게 요지다. 그럼에도 일단 가면 열심히 오른다. 뒤처지기도 하고 중간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동행인에게 피해나 걱정을 주고 싶지는 않아서 열심히 오른다. 약간 어린이와 비슷한 단순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가 단순하다고 말하는 어른은 어린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왜 그런 표현을 쓸까. 이렇게 쓰면서도 잘못된 비유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써 버렸고 그냥 수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 7세 조카는 음식의 외모만 보코 판단하여 흐물렁 거리게 생겼으면 어떤 맛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른도 마찬가지 아닌가, 먹어보지 않고 겉으로 이상하게 생겼다며 먹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투정 부리는 거에 익숙해서 툴툴거리기도 하고 무언가 반박하고 싶기도 해서 일단 뱉곤 하지만 막상 산에 도착하면 뭐 어쩔 수 있는가. 오르는 수밖에.


-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등산이 전투적이라는 거에 있다. 산에 오르는 건 과도한 열정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의 에너지가 많이 들고 칼로리 소모도 많이 될 것이다. 숲 속 산책이라면 반길 수 있다.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며 여유롭게 유유히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건 환영이다. 무릎이나 고관절이 아파도 모순으로 오래오래 걸을 수 있다.


- 친구가 산에 가자고 했을 때, 나의 가장 큰 반항 이유는 운동화였다. 산에 신고 갈 운동화가 없어. 나 다 단화나 스니커즌데 그런 거 신고 가면 무릎에도 다리에도 내 허리에도 너무 안 좋을 거야. 혹시 다칠지도 몰라. 발목이 접질릴지도 몰라. 너는 최근에 등산화 비슷한 걸 사서 등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했겠지만 나는 아니야, 큰일 나면 어떻게 해. 병원 다니고 싶지 않아. 친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가벼운 운동화 있는 거 다 알아. 엄마가 안 신는 운동화 신고 다니는 거 그거 있잖아.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니까 그 정도 운동화면 충분해. 핑계 대지 마. 나는 졌다. 이길 수 없다. 나의 변명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 술렁 넘어가 주지 않고 이렇게 딱 잘라서 억지 부리는 친구가 좋다. 제 발로 나서서 하지는 않지만 난 또 시키면 하는 사람이니까. 내 건강을 위해서인지 너의 새 등산화를 개시하기 위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아무튼.




2-1. 설악산


-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강원도에 사셨다. 강원도 토박이는 아니고 - 할머니는 서울 사람이고 할아버지는 이북 사람이다 - 어쩌다가 그곳에서 머무셨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까지 5년은 넘게 10년은 채 되지 않는 기간일 것이고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외갓집의 모든 식구들은 틈나면 설악산에 올랐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설악산 중간 어느 길과 연결된다고 했다. 나 빼고 모든 식구들이 대청봉에 오른 것 같다. 내 아래 사촌 동생들은 잘 모르겠고 내 위로 오빠부터 큰 이모부까지 모두 대청봉에 올랐다. 나는 울산바위나 흔들바위가 전부다. 어쩌면 이 둘 중에 더 낮은 한 곳만 올랐을지도 모른다. 울산바위니 흔들바위니 너무 익숙한 명칭이니까 내가 올랐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걸지도.


- 산보다는 계곡이 더 좋아서 물에 발 담그고 찰랑거리고 어슬렁 거리는 게 좋았다. 산속에서 흐르는 물은 깜짝 놀랄 만큼 차갑다. 오래 담그고 있지 못한다. 입술이 금세 새파랗게 질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키가 큰 나무들은 계곡을 덮고 있고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며 들어온다. 그때는 참 공기도 맑고 좋았는데 지금도 그럴까.



2-2. 도봉산


- 강북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남은 생도 강북에서 살지 않을까 싶다. 강의 북쪽에서도 경기도에 면해있는 거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가까이에 산이 참 많다. 동네에 친구가 별로 없던 나는 주말에 그렇게 심심해했다. 주말 아침에는 어쩐지 눈이 일찍 떠져서 하루가 더 길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산책 삼아 놀이 삼아 자주 갔던 곳이 도봉산이다. 도봉산 초입에는 칙 즙을 직접 짜서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어른들은 칙 즙이 몸에 좋다며 종종 사서 나도 두 모금씩 억지로 삼키게 했는데 그 강렬한 향에 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칙 즙 아저씨 옆에는 칙 뿌리가 쌓여 있었다. 나무를 이렇게 즙으로 만들어서 일부러 먹는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던 때다. 사람이라는 종족은 더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것도 일부러 찾아 먹는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슬프다.


- 도봉산에도 산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깨끗했고 시원했다. 송사리가 무리 지어 돌아다녔고 바위를 들치면 플라나리아도 있었고 과학책에서 보던 다른 생물들도 있었다. 개구리알이 부화하는 모습도 종종 살펴볼 수 있었다. 올챙이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개구리까지 오래 키운 적도 있다. 아기개구리는 귀여웠고 더 이상 크게 자라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박물관의 박제 동물처럼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 충격적이었는데 그날이 그림 그려지면 개구리의 귀여운 모습이 먼저 떠올라서 지금은 충격이라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생명의 사그라짐은 언제 직면해도 슬프고 가슴 아프다.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더 오래 살았을까.



2-3. 오대산


- 오대산 월정사에 가고 싶었다. 아니, 월정사로 통하는 길을 걷고 싶었다. 오래전에, 아마도 20대 초반에 사찰 건축을 공부하고 그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 길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 이후로 줄곧 마음에 품고 있다. 길을 감싸고 있는 나무는 키가 컸고 울창했다. 다소 뻣뻣하고 건조한 느낌의 길이었지만 무언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언제쯤 가게 될까.






3. 무언가를 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자는 사람


- 아기 때부터 조금 커서까지 왼쪽 엄지손가락을 빨았다. 조금 커서는 몰래 숨어서 잠을 잘 때만 이불속에서 조금씩 아껴가며 빨았다. 손가락을 빠는 행위는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고 엄마도 싫어해서 억지로 분리를 시도했다. 슬프고도 불안했다. 기분상인지는 몰라도 왼쪽 엄지손가락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비해서 조금은 약해 보인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되어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반면에 오른쪽 엄지 손가락은 단단해 보인다.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근거 없이 기대고 싶다. 덕분에 무거운 걸 오른손에 치중해서 들다가 엄지손가락이 꺾였고 한동안 악수하는 모양으로 엄지와 팔목이 움직이지 않도록 부목을 대고 있었다.


- 아끼는 마음은 소중하다. 관심과 믿음은 골고루 주어야 한다. 한쪽에 치우쳐서는 이런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손가락과 함께 복실복실한 하얀 곰돌이 인형은 어린 나를 지탱해 주었다. 어디든지 내가 가는 곳이면 함께 했다. 하얀 털에 때가 꼬질하게 타서 회색이 되어도 계속 들고 다녔다. 엄지손가락처럼 조금씩 분리가 되기는 했지만, 낮 생활에서의 분리였고 잘 때만큼은 안고 잤다. 딱 품에 품기 적당한 사이즈의 인형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안 된다. 외부에서 잠을 자게 되면 밤잠을 설치는 이유가 예민해서이기도 하지만 품이 허전해서이기도 하다. 안고 있을 때의 포근함, 나는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4. 여행지에서 현지인 모드 장착하기를 좋아하는 (좋아했던) 사람


-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 좋다. 한국이든 외국이든 상관없이 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걸어 다닌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 어떻게든 돌아갈 거니까.


- 대부분이 가본 유명 스폿에 나만 덩그러니 가보지 않은 적이 많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우도나 사려니숲길같이 제주도에 가면 꼭 들른다는 그런 장소에 나는 가본 적이 없다. 제주도에 가서도 무작정 걸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작은 식당이 나오면 들어가서 고기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너무 맛있었는데 다음에 찾아가려면 허둥지둥 댈지도 모른다.


- 바다 바라보며 멍 때리기, 공원에서 책 읽기,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 책 등이 마음에 드는 아무 책이나 꺼내어 넓은 책상 구석에 앉아 있기, 놀이터에서 아이들 노는 거 구경하기, 야외의자에서 커피 마시기, 마트에서 과자 사기, 나무 아래에서 빵 먹기, 식당에 들어가서 그림도 보지 않고 메뉴판에 있는 거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주문하기, 성당에서 모르는 언어로 평일 미사 드리기,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먹는다는 길거리 포리지 사 먹기, 정오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동네 산책하기, 중고 서점에서 오래된 책 찾기, .......


- 명동에서도 동대문에서도 부산에서도 사람들은 나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일본어를 조금은 할 줄 알았지만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그다음에는 중국어로 말을 걸고, 마지막에는 영어로 물어본다. 나는 수어로 화답하곤 했다.



수어를 요즘에는 통 쓰지 않았다. 다시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