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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ara 라라 Feb 14. 2024

가족, 그리고 파묘

- 라라 소소 17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면서, 명절 전후로 ‘파묘’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하면서 얼굴도 뵌 적 없는 시부모님의 제사상을 차려야 하는 며느리가 된 것이다. 친조부모님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한 공원묘지에 모셔있다. 공원묘지는 차도에서 골목으로 들어가고도 한참 지나서 안쪽에 위치해 있다. 그 진입로가 좁아 차를 타고 가든 걸어가든 늘 막힌다. 차가 없을 때는 성묘 음식을 이고 지고, 나와 오빠, 애 둘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 가면서 그렇게 좁은 골목을 지나 공원묘지에 진입했을 것이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입구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서 보기에는 좋고 머물기에도 나쁘지 않다. 저수지 뒤로 봉분이 차례로 계단식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통은 산을 깎아서 공원묘지를 만들었을 테니까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겠다. 보는 풍광은 좋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봐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중간보다는 위쪽에, 완전 꼭대기는 아니지만 위쪽에 더 근접한 곳에 자리 잡고 계신다. 내려올 때는 신나서 뛰기도 하지만 오를 때는 징징대며 엄마에게 매달렸겠지. 엄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차로도 올라가기 쉽지 않은 경사다. 위에는 주차 공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아래 저수지 옆에 넓게 펼쳐진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오르는 사람들도 많다. 거의 다 올라와서 봉분 바로 아래쪽에 있는 정자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보면 신기하게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솟아오른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가슴 아파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직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며 누군가는 이제 추억과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을 다양한 사연이 저 아래로 푸르게 펼쳐져 있다. 하나씩 자세히 살펴 보지 않으면 파란 언덕 아래에 저수지가 보이는 배산임수, 그저 좋은 자리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산소에 가서 큰집 식구들과 함께 성묘를 드리고 자연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게 마냥 좋았던 것 같다. 뭐든 잘 먹고 먹성이 좋아 차례 음식도 거침없었다. 추석 전후에는 늘 날이 좋아 잠자리도 잡고 나비도 잡고, 여치나 메뚜기도 잡고, 이웃 봉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꽃이랑 나무 구경도 하곤 했다. 가족과 소풍나온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조금 커서는 작은집임에도 대부분을 껴안고 있는 엄마의 고생이 눈에 보여 마음에 안 드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츰 산소에도 큰집에도 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결국 큰집과는 갈라섰고 조부모님 제사도 우리가 하고 있어, 때가 되면 엄마는 신경 쓸 일도 진짜 해야 할 일도 많아 변함없이 고생 중이다.     


나는 여전히 친조부모님 산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 안 간지 상당히 오래됐다. 제사 지낼 때 사진으로만 뵈어서 그런지 애정도 생기지 않고, 그냥 친가 식구들을 생각하면 별로 예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부모님과 오빠네 식구들은 때 되면 들러서 차례도 지내고 봉분도 돌보곤 한다. 관리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언제까지 공원묘지에 모셔 둘 수 있을까. 더 시간이 지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정이 없는 조부모님 산소까지 돌볼 여력이 있을까.


공원묘지에 매장으로 고인을 모신 경우에는 영구 사용이 아니라 임대의 개념으로 상황에 따라서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기간을 연장해도 60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자기 소유의 땅이나 선산에 모시는 게 아니니 임대라는 개념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영원하지 않음에 대한 씁쓸한 마음이 생겼다. 삶이 영원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추모의 의미로 장례 절차를 밟고 묘지에 모시는 건데, 그렇다면 그 의미는 60년만 지니고 마음에 간직해야 하는 건가. 60년이 지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뒤에는 보통 파묘의 절차를 거처 화장 후에 납골당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납골당도 관리비를 내기는 하지만 영구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니 다른 방도를 찾기도 힘들고 해서 그렇게 많이 하는 것 같다.      



애도와 추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전에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추모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 이라고 나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고, 생각하는 빈도수가 확연히 줄어들기도 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 눈에 잘 보이는 의미있는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망각의 동물이니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애틋하다.     


외할머니는 정이 많았고, 외할아버지는 무뚝뚝한 면이 있었으나 무심한 듯 마음 쓰시는 게 어린 나이에도 느껴지곤 했다. 무엇보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면 그냥 좋았다. 나에게는 유일한 할머니이고 유일한 할아버지니까 더 소중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나를 혼내면, 애한테 그러지 말라고 마냥 내 편이었던 할머니의 품과 음식이 그립다.     


외할머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외할아버지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 돌아가셨다. 외갓집은 사이가 좋은 편이다. 삼촌들도 대부분은 무난하고 외가 식구들의 몇몇 가정은 다정하기까지 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모였다. 손이 큰 할머니는 음식을 많이 만들었고 여러 식구가 모이니 아이들도 복작복작했다. 나보다 열 살 넘게 훌쩍 위인 사촌 오빠를 시작으로 내 아래로 열 살이 넘도록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까지 겹침 없이 두세 살 터울로 올망졸망 있었다. 나와 동갑인 또래 사촌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때 큰 삼촌네가 해외로 이민을 가서 그녀와의 기억은 그리 많지가 않다.     


어른이 돌아가시면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시는 것보다는 매장해서 봉분으로 산소에 모시는 걸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생각했다. 내가 밟는 절차가 아니었고 나는 그저 슬픔을 안고 어른들을 따르기만 했을 뿐이다.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산소는 팔당댐 근처 한강 상류가 보이는 좋은 곳에 있다. 천주교 공원묘지여서 더 믿음이 가기도 한다. 아무 때고 문득문득, 힘들 때면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각나고 그곳에 가고 싶어 진다. 엄청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만 힘들다고 징징대거나 그 길이 불만스러웠던 적은 없다. 더 이상 어리지 않기도 하거니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그럴 거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계시지 않은 명절은 왠지 모르게 썰렁했다. 숙모들은 할머니만큼 손이 크거나 음식을 맛있게 만들지는 못했다. 엄마는 손도 크고 음식도 맛있게 만들었지만 – 큰집과는 갈라서기 전이라 – 그 음식들은 다 친가 쪽 식구들이 먹었다. 명절 당일 저녁이나 다음날에 외삼촌네 집에 가면 반갑게 얼굴을 보고 한 끼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천주교 신앙을 가진 외가여서 제사와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의 위령미사도 성당에서 드렸는데, 그 제사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미사만 드리게 되었다. 삼촌들의 결정이었다. 그렇게 미사로 바뀌면서 각자의 집 근처의 성당에서 위령미사로 봉헌하게 되고, 외가쪽 식구들이 함께 모이는 일도 드물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할머니, 할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면 당일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당신들이 살아계실 적처럼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를 바라지 않으실까.     


시간이 흐르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집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다. 몇몇은 혼인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부부만 있는 가정도 있고, 아이가 있는 가정도 생겼다. 점점 분화되는 가정. 어쩌면 새롭게 형성되는 하나의 새로운 가정.     


핵가족, 직계가족, 확대가족이라는 용어를 배운 건 중학교 가정 시간이 아니지 싶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고, 외조부모님은 결혼한 자녀들과 함께 지내지 않고 두 분만 따로 살고 계셨다. 삼촌들도 각자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삼촌은 우리 집에서 한동안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그건 잠시였고 그 이후에는 혼자서도 잘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위에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자신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이, 부모는 조부모가 되고 조부모는 증조부모가 된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하나의 생명은 사그라든다. 대가족은 계속 대가족으로 대를 잇는 게 아니라 핵가족으로 축소된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함께 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모님과 오빠와만 살았다. 나는 대가족으로 조부모님과 함께 산 경험이 없다. 함께 살지 않아도 명절이나 때가 되면 모이고, 사랑을 나누고, 함께하는 시간을 쌓아가면 핵가족이어도 확대가족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마음으로 함께 하는 진짜 가족, 그리고 피를 나누지는 않았더라도 부부가 아니더라도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 진짜 식구. 핵가족화가 자연스러운 변화인데 다른 가족과의 교류가 없이 핵가족만의 삶을 생각하면 조금 아쉽다. 부부와 자녀라는 구성의 핵가족뿐 아니라 동반자와 함께하는 식구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런 구성을 나타내는 표현도 자주 사용되면 좋겠다. 


애정이 있어야, 또 얼굴을 마주 보고 함께하는 시간이 있어야 헤어졌을 때 애도도 추모도 가능하다.      


외조부모님 산소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 돌보고 싶다.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파묘는 상상만 해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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