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라 소소

괜찮구나, 괜찮구나. 그렇지 않아.

- 라라 소소 103

by Chiara 라라

내 방랑벽의 시작은 사랑의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이십 대의 나는 사랑이 무서웠고, 그래서 피하려고 했으나 상대의 조용한 머무름에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물들어 버렸다. 그 조용함이 다른 이들에게도 퍼지고 있어 누구나 다 물들어 버릴까 봐, 모두가 다 그의 옆에 있어 나라는 존재가 하찮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여전히 조용했고 그 천하태평을 내 심장은 견뎌내지 못했다. 이렇게 흔들리고 있다고, 당신이 잡아주면 좋겠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학기 중이었는데 부모님께는 휴강이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학교에서의 작업도 쉴 수 있고 이런 기회가 없으니 바람을 쐬고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도 잘 알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간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고 있어서 틈만 나면 선후배들과 답사와 출사를 다녔는데, 그중에 안동도 있었다.




관광객들이 모두 떠난 저녁의 하회마을은 고요했다. 다 한옥이라 가리지 않고 고르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민박에 들어가 짐을 놓고 나왔다. 소나무 숲길을 걷고 낙동강을 바라보고 주막 같은 식당에서 국밥을 조금 먹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이론들이 있었지만, 되도록 천천히 골목골목을 걸으며 흙의 색과 한옥의 곡선에 마음을 보냈다. 자연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아픔은 너무 사소해 보였다.


괜찮구나, 괜찮구나.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자, 풀벌레들이 쉼 없이 울어댔고 밝은 빛을 찾아 벌레들이 창호지 문을 톡톡 거리며 두드렸다. 괜찮지 않았다. 무서웠고 지독히 외로웠다. 나밖에 없었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작은 생명체들이 나를 무너뜨렸다. 숨죽여 울었다. 견디기 위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적었다.


변함없이 또다시 해가 떴다. 병산서원을 찾아 산길을 걸었다. 싸늘한 바람과 초록의 나무속에서 나는 숨을 쉬었다. 다시 살아났다. 괜찮구나, 괜찮구나.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며칠을 보내고 나는 조금 단단해졌다, 고 말하면 좋겠지만, 여전히 약해빠졌고 계속 흔들렸다. 다만, 며칠 연락이 되지 않은 후의 나를 그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고 한숨을 한번 쉬었다. 단단해진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도망치면 숨을 쉴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백번 중의 하나라도 언제든 찾아왔다. 그걸 잊지 못해, 다시 떠나곤 했다. 나의 방랑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용기가 있어서, 단단해서 다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고 싶지만 낼 수 없어서 돌아다닌다. 물러터진 내가 이곳에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낯선 곳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바라보며 떠난다.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국내든 외국이든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게 아니라 덜컥 겁부터 난다.


이제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하지만, 괜찮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다.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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