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츄르 Feb 06. 2022

19_자가 빌라 구입 1년 후기

연말정산 말고 혼삶 정산

세대주가 된지 n년차, 월세와 전세를 살다 이직으로 인해 중소기업 전세대출이 불가능해 진 지금은 월세를 아끼고 주택자금대출 원금갚는 걸 적금 대신 하자는 생각으로, 30년된 빌라를 자가로 구입해 살고 있다. 자가 빌라에서 원금을 갚은지는 지금 딱 1년하고도 한 달이 되었는데, 주택자금대출과 신용대출을 포함한 총 대출금액은 9300만원이었고 지금 남은 대출 금액은 8384만원이다. 그동안 916만원을 갚았으니 한달에 70만원 정도 원금을 갚은 셈이다. 집을 사기 전보다 절약정신이 루즈해져서 많이 갚지는 못하고 매달 강제로 빠져나가는 돈만 채우며 살아왔다. 일단 한두달만 이 상태로 살다가 봄부터는 조금씩이라도 통장에 현금을 쌓아보려 한다. 집값 갚는게 돈 모으는 거니 됐어! 하는 안일한 마음가짐을 버리고 다시 목돈을 모아볼 생각이다.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시절보다 훨씬 크고 내 마음에 쏙 들게 인테리어까지 한 집에 살고 있으니 비싼 월세를 낸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다. 사실 지금도 이자로 월세를 내고 있는 셈이긴 하다. 다만 그 금액이 서울에서는 반지하 원룸 월세도 안된다는 점이 이득일 뿐이지 지금도 월세를 내고 있는 건 맞다.


모은 돈 4700만원으로 서울에서 살 수 있는 집은 오래된 빌라 뿐이었는데, 빌라 구입을 뜯어말리는 유튜브의 수많은 콘텐츠들과 주변인들의 우려에도 나는 빌라를 샀다. 결혼해서 각자 모은 돈에 영끌 대출을 받아 수도권 아파트를 구입할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1년 전 나는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결혼 계획 따위는 더욱 더 없었다. 만약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어도 선이라도 봐서 32살 정도엔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해도 일반적인 직장인 부부가 영끌해서 살 수 있었던 수도권 아파트들까지 터무니없이 비싸진 지금 와서는 그런 계획조차 무산되었을 것이다. 정신승리일 수도 있지만 과거의 나는 내 삶의 질과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1년을 살아보니 구옥 빌라인만큼 당연히 단점은 있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인데, 퇴근하고 돌아오면 남의 집 저녁밥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울 때가 종종 있다.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도 콩나물국 냄새 같은게 진하게 난다. 다행히 창이 많아 몇 분 환기시키면 괜찮긴 한데, 이 집의 최대 단점이라면 그거다. 그리고 엘레베이터가 없다보니 가구를 구입할 때 추가비용이 든다. 창 쪽에 외풍이 조금 있는 편인 것도 겨울에는 큰 단점이었는데 그건 두꺼운 암막 커튼을 달아놓으니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 외에 딱히 다른 단점은 없다. 물도 잘 나오고 난방도 잘 되고 채광도 좋고 환기도 잘 된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아파트처럼 20만원대의 관리비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빌라에 오래 사신 할머니 한 분이 한달에 관리비 만원씩을 걷어 1년에 한 번 정도 방수 코팅인지 뭔지를 건물 외벽에 하고 주기적으로 하수구 청소업체도 부른다. 수기로 1년 정산을 써서 집집마다 종이를 돌린 걸 봤는데, 관리비 외에 지하방 월세도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뭔가 많이 미심쩍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가 건물 관리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데 대한 수고비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디 장수하시길.

물론 아파트 관리비에는 건물 내부에 사용할 수 있는 주차장과 엘리베이터, 도서관과 헬스장 등이 포함되어 있어 그 돈값 이상을 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많은 혜택들이 별로 필요가 없다. 일단 깨끗하고 책도 많은 도서관이 우리집 200미터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앞이다. 헬스장은 없지만 북한산이라는 최고의 산스장이 인근에 있어 작년에는 등산에 취미를 붙였고 그 덕에 작년 한 해 내 인생 최대의 운동량을 기록했다. 인근에 1급수 맑은 물이 흐르는 천변이 있어 산책하기 참 좋고 5분 거리에 지하철역이 있다. 그 지하철역이 있는 대로변, 그러니까 내 생활권에는 가로수가 전부 벚나무라 봄이 되면 영화 속 처럼 환상적인 장면이 매일매일 펼쳐진다. 1년 내내 그 풍경만 기다리며 살아도 삶의 낙이 있을 정도다.


지역적인 부분에서의 단점은 내 영혼의 고향(?)인 홍대 인근(홍대 연남동 신촌 망원 합정 등)과 멀다는 것. 대신 이태원이 놀랍도록 가까워져 이태원의 매력을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잘 안다녀서 몰랐는데 예쁘고 근사한 식당과 카페들이 (결은 좀 다르긴 해도) 이태원에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달에는 소중한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파티룸을 빌리고 의상을 대여해 샴페인을 터뜨리며 놀았다.


지난 1년 개인적인 이유로 슬플 때도 있었고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이 크게 상승했다. 이런 글을 쓰는 가장 큰 목적은 물론 스스로를 위한 정신승리겠지만, 한 편으로는 과거의 나와 비슷한 상황인 20대 친구들이 만약 이 글을 본다면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허리띠를 졸라모은 돈으로 주식이니 코인이니를 해서 아파트를 사고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물론 그런 것을 하는 삶도 좋겠지만, 유튜브에 나오는대로 모두가 재테크에 성공하고 아파트를 살 수 있다면 그 때는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또다른 무언가가 생길 것이다. 대세라고 생각되는 삶의 방향이 분명히 있겠지만, 꼭 그 길을 가지 않아도 내 삶을 내 나름대로 꾸려나갈 수 있으면 된다. 갑자기 불행한 일을 당할 것에 대비해 큰 돈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은퇴 후 노후에도 걱정없이 살려면 어마어마한 돈을 모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병에 걸리거나 늙기 전에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은 이 시대에 그런 얘기들은 오히려 안 그래도 불안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더 병들게 하는 것 같다. 정신적으로 약해지면 어차피 건강도 챙길 수 없고 돈도 모을 수 없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결론, 평생 돈 모아도 아파트는 못 살 것 같고 재태크에 소질도 없고 당장 결혼 계획이 없다면, 잘 고른 구옥 빌라에서 사는 것도 나름 괜찮습니다.


이전 19화 18_요리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