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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Sep 27. 2020

깡통시장 ‘빵야 할아버지’

중학생 때 학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부산 깡통시장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12시가 되면 한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이 할아버지는 불규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도 쉽게 만날 수 없다. 계절과 상관없이 빨간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의 할아버지는 깡통시장 어딘가에 앉아 담배를 태운다. 담배가 꺼지기 전 할아버지를 만나면 어디론가 갈 수 있다. 단, 암호를 말해야 한다.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만남에서 암호는 “빵야 빵야”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담배를 비벼 끄고 가래를 뱉은 뒤 나지막하게 “으악...”이라고 대답한다. 암호를 말한 사람을 깡통시장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는데, 그 길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외울 수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할아버지가 시장 좌판을 들어 올린다. 그곳이 바로 ‘비밀 상점’이다.


좌판 밑 쪽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면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파는 것은 다름 아닌 ‘총’이다. 영화, FPS게임에서만 봤던 무기가 지하 상점에 가득하다. 하지만 이 비밀 상점은 영업시간이 있다. 손님이 발을 내딛는 순간, 할아버지는 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가 꺼지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손님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것저것 만져보며 감탄한다. 마감시간을 알리는 담배의 마지막 연기가 할아버지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담배를 땅에 비벼 끄고 가래침을 뱉는다. 할아버지는 총을 만지고 있는 손님에게 다가가 말한다. “그렇게 다루는 거 아입니더”라며 들고 있던 총을 받아 든다. 손님은 순식간에 총알을 장전하는 할아버지 모습을 넉 놓고 바라본다. 그러곤 “문 닫을 시간이라예”라고 말하며 손님 이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학원 선생님은 깡통시장 ‘빵야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했다. 어린 시절 이 섬뜩한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은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자’,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자’, ‘가게 영업시간을 확인하자’였다. 지금 ‘빵야 할아버지’ 이야기를 떠올리며 드는 생각은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걸 팔길래 총까지 판다고 했을까’이다. 내 추억 속 깡통시장은 정말 많은 것을 파는 시장이다. 화개장터는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지만 깡통시장은 없어야 할 것(물론, 총은 없다. 없어야 한다)도 있다는 소문이 돌만큼 품목이 다양하다. 

부산 깡통시장은 국내 최초로 야시장을 개장했다. 골목을 돌아다니면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다. 국내 음식은 기본이고 해외 전통음식도 먹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외 관광객들에겐 이 곳이 필수 코스다. 메뉴판을 보면 한글 밑에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적혀있다. 어느 가게에는 떡국은 rice-cake soup, 냉면은 cold noodles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웃었지만 생각해보니 정확한 번역이라 뻘쭘했다. 대학생 때 친구와 놀러 갔다가 이곳이 한국인지 외국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언어가 들려왔다. 그날 엄청난 ‘국뽕’이 차 올랐다. This is K.O.R.E.A!


시장에서 위쪽으로 가면 책방 골목이 나온다. 헌 책방 골목으로 유명한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고등학생 때 자주 찾은 곳이다. 엄마에게 책 산다고 돈을 받은 뒤 보수동 헌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새 책은 정가에 사야 하지만 이 골목에서 헌 책으로 사면 남은 돈을 ‘삥땅’ 칠 수 있다. 그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친구들과 PC방에 갔다. 비자금을 안전하게 만드는 자금세탁 골목이었다. 요즘 얘들은 이 곳을 자주 찾는지 모르겠다. 나 때는 책 사러 가면 아는 얼굴을 종종 만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서로 암묵적으로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그 친구들과는 간혹 PC방에서 재회했는데 나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이 헌 책만 취급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새 책도 판매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골목의 매력은 뜻하지 않은 헌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마음의 양식이 고플 때 걷기만 해도 지식이 쌓일 것 같은 골목이다.

‘부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다일 것이다. 해양도시 부산에 왔으면 당연히 싱싱한 해산물은 필수다. 깡통시장에서 10분만 걸어가면 싱싱한 해산물이 천지 빼까리인 ‘자갈치 시장’이 있다. 도로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는 두 시장은 서로 win-win관계다. 핫플 깡통시장 투어 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자갈치시장으로 향한다. 부산 대표 어시장답게 다양한 어류들이 있다. 특히 야외에서 먹는 꼼장어가 대박이다. 광고대행사와 미팅을 끝내고 자갈치시장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온 대행사 직원에게 부산의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산에서 꼼장어 손질을 가장 잘한다는 할머니 가게로 가서 야외 자리에 앉았다. 당연히 메뉴는 꼼장어였다. 소금구이를 시작으로 양념구이까지 선보였다. 마지막은 볶음밥으로 마무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테이블과 발 밑에 소주병이 셀 수 없을 만큼 넘쳐났다. 자리가 끝나고 대행사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한 잔 더 하겠다고 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대행사 대리님이 술에 취해 신발을 신지 않고 걷고 있었다. 부산의 맛을 제대로 보여 준 것 같아 뿌듯했다. 기억하나요 대행사 직원 분들? “마 이게 부산이다”

이탈리아에 밀라노가 있다면, 부산엔 광복로가 있다. 깡통시장에서 남포동 방면으로 5분만 걸으면 광복로 패션거리가 나온다. 핫한 패션 브랜드가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고, 골목 사이사이엔 구제의류 가게도 찾아볼 수 있다. 옷 가게가 많은 만큼 옷 좀 입는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걷다 보면 옷 잘 입은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가끔 ‘저것도 패션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도 지나간다. 당최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은 옷이지만, 이 곳에선 시대를 앞서가는 ‘패셔니스타’로 통한다. 나처럼 패션 문외한은 프레타포르테와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광복로 길바닥에서 배우게 된다. 유명 브랜드 매장과 곳곳에 있는 분수 그리고 벽돌로 느낌 있게 포장된 거리를 걷는 패셔니스타들을 보고 있으면 해외 유명 런웨이를 보는 것 같다. 


부산 깡통시장은 곳곳에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단언컨대, 부산의 대표 여행지다. 최근 파견근무로 깡통시장 주변에서 일하게 됐다. 반가운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시장을 둘러봤다. 그러나 요즘 깡통시장은 예전 같지 않다. 대학생들이 가득했던 먹자골목은 한산하다. 어묵과 물떡을 끼워 넣자마자 팔리던 거리는 텅 비어있다. 그 시절 우리 모두를 ‘배정남’으로 만들어 줬던 구제시장과 패션거리는 상권이 죽어갔다. 30% 할인으로 시작해 40%를 지나 최대 70%까지 할인율이 치솟았다. 며칠 뒤, ‘할인’이 적힌 곳에는 ‘임대’ 문구가 붙었다. 해외 여행객을 위해 메뉴판에 일본어, 중국어, 영어를 넣은 식당은 TV 소리만 들린다. 나처럼 인근 회사원들만 찾아와 음식을 주문한다. 줄 서서 먹던 주변 맛 집도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다. 

깡통시장의 옛 모습이 사라진 원인은 ‘코로나 19’때문이다. 지독한 전염병은 외국인의 발길을 끊게 만들었다. 멍하게 걸으면 주변 사람과 부딪치기 일쑤였던 광복로도 곧 주저앉을 것처럼 말라갔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의류 매장 밖에서 서성이기만 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이웃 시장인 자갈치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회식과 외식이 줄어들며 시장 상인 모두가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면 많은 걸 즐길 수 있었던 시장이 언제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까? 활력을 잃어가는 시장을 눌러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보기만 해도 편치 못한데, 시장 상인과 인근 가게 종사자는 어떤 상황일지 헤아릴 수가 없다. 학원 선생님께 들었던 ‘빵야 할아버지 괴담’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하루빨리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예전 명성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힘내라 깡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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