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허벅지쯤 오는 곳에서도 서핑은 꿈도 못 꿨다. 수심이 얕아서 파도가 힘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좋은 파도를 찾으려 보드에 엎드려 이리저리 부유했다. 몇 번 타긴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핑하는 시간보다 파도를 찾아다니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물밖으로 나왔다. 서핑 샵 입구에 앉아 있다가 코치님을 만났다. 반가운 얼굴로 "서핑 잘했어요?"라고 묻는 코치님에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강습을 더 받아야 한다'거나 '개인 슈트를 사야 한다'는 식의 영업 멘트가 날아들거라 예상했다. 철벽을 치려했던 나에게 코치님은 "서핑 잘했네요"라며 뿌듯해했다. 서퍼들 사이에선 파도 타는 것만 서핑이 아니라고 한다.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쫒아다니고 파도를 기다리는 것부터 서핑이라고 했다. 즉, 파도에 오르기까지 준비과정도 서핑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서핑을 안 한 게 아니라 충분히 서핑을 한 것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은 어떤 일을 시작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는 그저 '준비'이며 본격적인 '시작'과는 구분하여 생각한다. 서핑을 하며 느낀 점은 파도를 쫒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과정도 '시작'이라는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창업 준비도 창업이며, 취업 준비도 취업이다. 회사 생활하며 들었던 말 중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 9시 업무 시작이면 8시 30분에 미리 와서 업무 '준비'를 하라는 상사의 지시였다. 그 상사에게 서핑을 알려주고 싶다. 업무 준비도 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