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사유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소장 Oct 21. 2020

파도를 기다리는 것부터 서핑

춥지 않을까? 가을 바다에 서퍼들이 가득하다. 부산 송정해수욕장의 가을은 여름보다 더 뜨겁다. 바닷물 온도는 3개월가량 늦다. 지금이 10월이면 바다는 7월쯤 된다. 물 밖 가을이지만 물속은 아직 여름이다. 레저존도 풀렸으니 서핑하기에 이보다 더 최적의 환경은 없다. 나도 송정 바다를 누비는 서프 홀릭 중 한 명이다.

서핑 강습 기간 동안 코치님은 나에게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금방 배운다"라고 했다. 역시 나는 아쿠아맨이다. 자신감이 차올랐다. 다섯 번의 서핑 강습을 끝낸 뒤 혼자서 바다로 향했다. 보드에 엎드려 배운 것을 상기하며 파도를 기다렸다. 일렁이는 파도를 보고 패들링을 시작했다. 파도와 보드 끝 부분이 맞물려 속도가 붙을 때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보드가 앞으로 쏠렸다. 중심을 잃은 나는 바다로 고꾸라졌다. 코와 입속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파도를 타기는커녕 파도에 치여 허우적거렸다. 혼자서는 아직 무리인 것 같아 얕은 곳으로 나왔다.


물이 허벅지쯤 오는 곳에서도 서핑은 꿈도 못 꿨다. 수심이 얕아서 파도가 힘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좋은 파도를 찾으려 보드에 엎드려 이리저리 부유했다. 몇 번 타긴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핑하는 시간보다 파도를 찾아다니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물밖으로 나왔다. 서핑 샵 입구에 앉아 있다가 코치님을 만났다. 반가운 얼굴로 "서핑 잘했어요?"라고 묻는 코치님에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강습을 더 받아야 한다'거나 '개인 슈트를 사야 한다'는 식의 영업 멘트가 날아들거라 예상했다. 철벽을 치려했던 나에게 코치님은 "서핑 잘했네요"라며 뿌듯해했다. 서퍼들 사이에선 파도 타는 것만 서핑이 아니라고 한다.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쫒아다니고 파도를 기다리는 것부터 서핑이라고 했다. 즉, 파도에 오르기까지 준비과정도 서핑의 일부였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서핑을 안 한 게 아니라 충분히 서핑을 한 것이었다.

준비하는 과정은 어떤 일을 시작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는 그저 '준비'이며 본격적인 '시작'과는 구분하여 생각한다. 서핑을 하며 느낀 점은 파도를 쫒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과정도 '시작'이라는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창업 준비도 창업이며, 취업 준비도 취업이다. 회사 생활하며 들었던 말 중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 9시 업무 시작이면 8시 30분에 미리 와서 업무 '준비'를 하라는 상사의 지시였다. 그 상사에게 서핑을 알려주고 싶다. 업무 준비도 업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가를 시작한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